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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골목길 확 뜯어고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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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주.정차 차량들이 골목길 양편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1동 한 골목길. 차량 앞 전신주에 '학교 앞 어린이 보호구역'이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지만 안전한 보행을 위한 장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차들 사이에서 갑자기 뛰어나오는 초등학생들과 골목을 질주하는 화물차들 때문에 폭 9m, 길이 80여m에 불과한 이 길은 항상 사고 위험을 안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학교 주변.도심 주택가 생활도로에서의 교통사고 사망자 비율이 자동차 전용도로 등 넓은 도로에서보다 훨씬 높다. 2001년 서울시내 교통사고 사망자 5백7명 중 보행 중 사망자는 2백71명으로 53%를 차지했으며 이 가운데 도로 폭 12m이하 좁은 도로의 사망자가 2백명에 달했다.

서울시는 이같은 도심 골목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올해부터 사고 다발지점에 대해 대대적인 수술에 나선다.

그동안 보도.차도의 특별한 구분이 없어 보행자 사고가 잦았던 주택가나 학교 근처 도로를 '보행우선 지구'로 지정, 도로 구조를 개선하고 자동차 위주로 돼있는 현행 교통 관련 법령을 고치기로 했다.

◇보행자 우선지구 지정=우리의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 비율은 네덜란드(9.8%).미국(11.3%).일본(28.4%) 등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다. 선진국들은 보행자 사고가 잦은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 등을 특별 관리해 왔다.

독일은 1982년부터 '템포30(tempo30)', 영국은 90년부터 '20마일존'과 '홈존(home zone)', 일본은 '커뮤니티존(community zone)'이라는 이름으로 보행우선지구를 지정, 사고를 줄여왔다.

서울시에서도 97년 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보행권 확보와 보행 환경 개선을 위한 기본조례'를 제정, 98년부터 걷고 싶은 거리 만들기 등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시의 자체적인 시설 기준이나 조례 개정만으로는 주택가 생활도로에서의 보행 안전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시는 2000년 시민의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환경을 조성하거나 보행권 확보를 위해 필요한 곳에 보행우선지구를 지정할 수 있는 조례도 마련했으나 현재까지 지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시에선 올해 안에 보행우선지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 늦어도 내년부터는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다양한 교통안전 시설 설치=보행우선지구로 지정되면 지구가 시작되는 지점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최고 속도를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주위와 구별되는 색상.재질로 도로를 포장한다.

또 입구에 과속방지턱을 설치하거나 도로 폭을 축소해 차량이 무리한 속도로 골목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다.

이 밖에 지구 내에는 차량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여러가지 '교통진정(traffic-calming) 시설'을 설치한다. 접촉사고가 잦은 네거리는 교차로 자체를 주변보다 높이거나 미니 로터리 형식으로 전환하는 방식도 도입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현재 덕수궁길처럼 지구내 도로를 곡선화해 통과 차량이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할 방침이다. 횡단보도를 주변 보도와 똑같은 높이로 만들고 사다리꼴로 넓게 퍼뜨려 도로방지턱과 횡단보도의 두가지 기능을 겸할 수 있게 하는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학교 주변 골목길은 차도 폭을 줄이더라도 보행 통로를 의무적으로 확보토록 하고 운전자 시야 확보를 위해 횡단보도나 교차로 주변엔 주차장 설치를 금지하는 것도 검토중이다.

◇법적.제도적 미비 해결해야=시는 보행우선지구를 본격적으로 지정.운영하기 위해 연내에 경찰청 등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마무리지을 방침이다.

그러나 지구 지정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우선 보행우선지구라는 명칭을 도로교통법상에 명시해야 하고 그 안에 ▶보행자 권리▶속도.통행 제한▶과속방지턱 등의 시설 기준을 포함시켜야 한다.

보행우선지구 내 교통사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교통안전시설 설치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경찰청과의 협의도 필수적이다.

현행 도로교통법 제8조는 '보행자는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아니한 도로에서 도로의 좌측 또는 길 가장자리 구역을 통행해야 한다'고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어 사고 발생 시 책임소재 등을 둘러싸고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정석 박사는 "그동안 자동차 통행에만 신경써온 교통정책 마인드를 보행자 입장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건교부.경찰청.시 관계기관 등과의 협의를 거쳐 보행자 권리를 찾아주는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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