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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조각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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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22면

1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구아리쉬가 디자인한 조명.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조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두 줄기 조명이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2 이탈리아 디자이너 지노 사파티가 디자인한 조명. 키네틱 아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3 프랑스 디자이너 세르주 무이가 디자인한 조명. 모빌처럼 조명들이 자유롭게 각도와 위치가 조절된다. 4 덴마크 디자이너 폴 헤닝센이 디자인하고 루이스 폴센에서 생산한 ‘아티초크’. 72개의 갓이 빛을 환상적으로 분산시킨다. 5 프랑스 조명회사 리스팔이 생산한 조명. 장 아르프의 추상 조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6 미국의 조각가이자 디자이너인 이사무 노구치가 종이를 갓으로 활용해 디자인한 ‘아카리’. 동양적인 감성이 물씬 풍긴다.

한국 가정에서 조명의 구실은 어둠을 밝히는 것 이상으로 잘 확대되지 않는 것 같다.

김신의 맥락으로 읽는 디자인 <11> 아트 조명

우리 가정에서는 크게 세 종류의 조명이 있다. 거실이나 주방 같은 특정 공간 전체를 밝히는 주 조명, 공부나 책읽기를 위한 탁상 조명, 마지막으로 식탁을 밝히는 펜던트 정도다.

해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닥 조명(floor lamp)이나 벽에 부착하는 벽 조명(wall lamp)은 가정에서 좀처럼 볼 수 없고, 카페나 매장 같은 상업 공간에서만 주로 사용된다. 이는 아파트가 보편화된 주거환경 속에서 조명이란 대개 건설사가 제공하는 ‘빌트 인’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조명을 굳이 돈 들여 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그만큼 관심도 적다.

그러나 서양에서 조명은 인테리어의 핵심 요소로 간주돼 왔다. 하나의 아름다운 오브제로서 사람들의 눈을 끄는 동시에 다른 사물들을 비추어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아주 독특한 물건이다. 따라서 조명 디자이너는 조명기구 자체의 디자인을 매혹적으로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빛이 어떻게 공간으로 확산되는지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인테리어 좌우하는 아름다운 오브제
빛의 확산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한 디자이너는 덴마크의 디자이너 폴 헤닝센이다. 그가 나오기 전까지 조명은 두 가지 스타일이었다. 전구 자체를 노출하는 것과 반구형의 갓을 씌워 빛이 직접 눈에 닿는 것을 막아주는 것. 전기등은 1879년 에디슨에 의해 상품화되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재래식 등인 가스등과 석유등이 함께 쓰였다. 그리고 이들은 전구보다 더 은은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빛을 비춘다는 점에서 여전히 사랑을 받았다. 헤닝센은 전기등에 이 같은 느낌을 주고자 했다. 재래식 광원보다 훨씬 강렬한 전구의 빛을 줄이고자 그릇처럼 생긴 갓을 여럿 포갰다. 이로써 어떠한 각도에서도 눈부신 전구가 보이지 않으며, 은은하고 부드럽게 공간을 감싸 안 듯 빛을 분산시키는 조명이 탄생했다.

조명기구 제조업체인 루이스 폴센은 폴 헤닝센의 조명기기에 그의 이니셜을 딴 ‘PH’라고 이름 붙여 1927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의 조명기구들은 뛰어난 기능성과 아름다운 모습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그는 중첩된 갓 시리즈를 더욱 발전시켜 57년에는 무려 72개의 나뭇잎처럼 생긴 갓을 가진 ‘아티초크(Artichoke)’를 디자인했다. 이 조명은 뉴욕의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많은 미술관의 소장품이 될 정도로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솔방울처럼 생긴 아티초크에서 볼 수 있듯 조명은 집안의 여러 물건 가운데에서도 가장 조각적이다. 조명의 구조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받침대, 갓, 그리고 받침대와 갓을 연결하는 줄기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조명은 가전제품처럼 내부에 복잡한 장치가 들어가지 않으며, 가구나 식기처럼 전형적인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 조형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고 어떤 물건보다도 예술적 접근이 가능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 국가들의 재건 노력에 따른 풍요의 시기가 오자 조명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타고 패션처럼 디자인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당시 디자이너들의 영감을 자극한 것은 바로 추상 조각이다.

추상조각·키네틱아트와 만나 변신
모더니즘 조각의 가장 큰 특징은 인물이나 동물과 같은 실재하는 자연물을 더 이상 모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 아르프와 헨리 무어 같은 조각가는 유기적인 형태의 조각품을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생명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냥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마치 창조주처럼 모방이 아닌 새로운 물체를 창조하고자 했는데, 돌이든 금속이든 그 재료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구체화했다.

30년대부터 꾸준히 발전해 온 추상 조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디자이너들은 조명의 줄기나 갓에 그런 생기 어린 형태감을 부여했다. 프랑스 조명회사 리스팔(Rispal)은 장 아르프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는 조명기구를 다수 생산했다. 50년 생산된 리스팔 조명은 줄기가 받침대 역할까지 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생명체가 자란 듯한 유기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조각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이기도 한 일본계 미국인 이사무 노구치는 50년대 초반부터 금속 뼈대에 종이 갓을 씌운 ‘아카리(Akari)’ 조명 시리즈를 내놓았다. 그는 종이라는 재료를 활용해 비대칭적이고 엄격하지 않은 유기적 형태의 조명을 해마다 발표했다.

추상 조각의 또 다른 형태인 모빌 역시 조명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종의 키네틱 아트인 모빌은 미국의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가 선보였고, 스스로 자신의 조각을 ‘모빌(Mobile)’이라고 이름붙였다. 모빌은 공간적 특징을 가진 조각에 시간성을 부여한 것이다. 약간의 공기 흐름만으로도 움직이는 모빌은 여러 가지에 달린 조각들이 중력의 힘으로부터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기술적인 핵심이며, 이것이 디자이너들을 매료시켰다.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구아리쉬가 만든 길다란 줄기를 가진 두 개의 조명은 무거운 원추에 의해 공중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 칼더의 모빌을 닮았다. 이탈리아의 조명 디자이너 지노 사파티가 디자인하고 아레돌루체가 1951년 생산한 마루 조명 역시 모빌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의 조명 디자이너 세르주 무이는 대학에서 금속공예와 조각을 전공한 경력을 살려 다양한 조각적 형태의 조명을 디자인했다. 그는 가늘고 기다란 줄기 끝에 유기적 형태의 갓이 달린 독특한 조명 시리즈를 발표했다. 줄기와 갓이 모두 방향이 자유롭게 조절되며, 키네틱 아트의 특징을 잘 살린 것으로 평가된다.
굳이 추상 조각과 모빌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자유로운 조형이 가능한 조명은 디자이너들로 하여금 조각적 접근을 가능케 한다. 60년대에는 플라스틱이 조명의 재료로 각광받으면서 더욱 유기적이고 조각적인 형태의 조명들이 등장한다.

LED라는 새로운 광원이 각광받고 있는 21세기에는 어떤 새로운 조명이 사람들을 놀라게 할지 궁금해진다.



김신씨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7년 동안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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