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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있으면 대선 출마 양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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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강점은 대중적 인기다. 수만 명 단위의 자발적 팬클럽이 있는 정치인은 노무현 대통령과 박 대표 말고는 없다. 그가 지난해 3월 23일 한나라당의 대표로 선출된 지 1년이 됐다.

취임 당시 야당의 처지는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와 같았다. 탄핵 역풍과 차떼기 오명으로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박 대표는 그런 한나라당을 22일 뒤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살려냈다. 선거 승리는 열린우리당이 차지했지만 총선 드라마의 주인공은 박근혜였다.

그렇다고 1년 동안 영광만 있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련이 많았다. 여권의 과거사 논쟁, 4대 입법을 둘러싼 공세는 강력하고 집요했다. 한나라당 내부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사실상의 레이스가 시작된 가운데 이른바 '친(親)박'과 '반(反)박'은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다. 인터뷰 두 시간 동안 박 대표는 그간의 소회와 현 정국의 진단, 미래를 향한 구상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최근 "지독한 여권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뭐가 그렇게 지독했습니까.

"총선부터 제가 표적이 됐어요.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습니까. 옛날 일(과거사)도 그렇고…옮기기도 힘들 정도죠. 그래도 나는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선거 때 국민을 편하게 해 드리겠다고 약속했고 정치 문화를 높이기 위해 참았습니다. 하지만 4대 입법 처리 땐 헌법에 도전하는 것이어서 싸웠습니다. 그쪽과 우리의 철학적 차이가 너무 컸어요. 그래도 저는 장외투쟁 한번 안 했습니다. 옛날과 비교해 보세요."

'지독한 여권'에 대해…
나 공격할 땐 참았지만 헌법에 도전은 못 참아. 그래도 장외투쟁은 안했다

-야당 대표를 1년 하셨는데 득실은 따져보셨습니까.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내놓는 등 손해를 많이 본 것은 아닙니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라가 편안해지고, 경쟁력을 갖고 잘 살게 되고, 세계에서 자랑스럽게 만들고, 그리고 그 나라에서 저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야당 대표로 노력하고 그러는 거지 저 중심으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정치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가수가 앨범을 내는 것 같은 그때 그때의 완성이 없습니다. 다만 현실에서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1997년부터 정치를 하셨으니 8년째입니다. 우리 정치를 평하신다면.

"저는 예전부터 정치권이 어떻다는 건 좀 아는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핵심에서 많이 보고 들었고 얘기도 나눴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엔 세상이 변하면서 사람 마음도 변하는 엄청난 격동을 봤어요. 배신감도 들었고… 그때는 멀찌감치에서 정치를 지켜봤습니다. 그래서 직접 정치를 하면서 웬만한 일엔 놀라지 않습니다. 심연의 끝까지 내려갔다 오면 놀라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있잖아요. 세상의 모든 건 변하고 가치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권세와 부귀영화, 심지어 대통령직도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삶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기둥 같은 게 나타났는데, 그건 어떤 경우라도 바른 길을 걷는다는 겁니다. 뜻을 못 이루더라도 부끄럽진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많은 사람이 박 대표와 한나라당에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과연 집권 전략이 있는지, 의지와 능력, 그리고 리더십이 있는지입니다.

"당의 지지율을 높이고 정권을 잡는 것은 구성원 전체가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당에서 희망을 봐요. 당이 굉장히 민주화되고 발전적으로 가고 있습니다. 공천.인사.재정 등이 투명하게 시스템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또 지금의 리더십은 혼자서 모든 것을 만들고 끌고 가는 게 아닙니다. 모두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민주적 절차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국민이 공감하는 판단을 하고, 당이 지켜야 할 노선은 분명히 지키는 것이 리더십이겠지요. 하지만 아직 실험단계입니다. 왜 당이 단결된 모습을 못 보여주느냐는 얘기도 있는데 120명 중 한두 명의 생각을 갖고 당론이 바뀐 것처럼 받아들일 땐 안타깝지요."

-그래도 박세일 의원의 사퇴 같은 일은 막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분은 학자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이해합니다. 다만 행정도시법 찬성 당론은 오랜 시간 찬반 토론을 거쳐 깊이 생각한 끝에 한 표결로 이뤄진 것입니다. 표결 결과에 공동 책임을 지는 모습이 당이 발전해 나가고 시스템이 자리 잡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더십에 대해…
내 생각과 다른 당론이라고 대표 공격해 바꾸려는 시도는 옛 '1인 보스체제'의 관성

-박 대표를 비판하는 사람은 정책의 내용이 없다고 하는데 이번 미국 방문에서는 '북한판 마셜플랜''군사적 주적 개념''한국식 밥상론' 등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준비해 가신 건가요.

"미국에 가서 싱크탱크.의회.행정부의 중요 인사를 많이 만났는데 대화를 통해 이해가 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야당도 집권 역량을 높이기 위해 많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북핵 문제라는 현안에 대해 우리 당의 기조를 잘 보여주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박 대표의 강점을 인기라고들 하는데 지지율로 한나라당에선 1등이지만 고건 전 총리에겐 계속 뒤지고 있습니다. 그것과 별도로 인기라는 게 허망한 측면이 있어 세가 없으면 위기가 왔을 때 견디기 어려울 텐데요.

"내가 출마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지지율이야 있는 대로 보고 있습니다. 정치에서 계파가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고 제가 약속한 것은 앞으로도 지킬 것입니다. 하지만 의기가 투합하고 목표가 같은 분들과는 힘을 합해야겠죠. 제게 계파는 없고 동지는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정치하는 게 지금 시대에 안 맞는 건지 모르지만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대선 출마와 관련해 동생인 박지만 회장이 "누님은 평소 '나보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 양보하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정말 그런가요.

"동생이 옆에서 보면서 그렇게 느꼈나 봐요. 그런데 정말 그래요. 꼭 아무개가 후보가 돼야 한다는 건 없잖아요. 대통령은 국민이 선택하는 겁니다. 저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면 국민이 편안해지고 나라가 부강해지겠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을 유권자가 선택하는 거지, 대통령이란 권력을 누군가가 뺏거나 쟁취하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제 생각이 다른 정치인과 다른가 보죠?"

-한 나라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려면 강한 권력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치의 패러다임과 국민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런 시대 변화에 맞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관성이란 게 있는 것 같아요. 1인 보스 체제에 대해 이건 안 된다 하면서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관성이 남아 다른 식으로 하면 반발합니다. 가령 당론이 결정되면 대표를 공격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식 말입니다."

-행정도시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론을 결정하는 의총에서 저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어요.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면 그것이 당론이 되고 대표는 또 그걸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야합이니 '사쿠라'니 별 얘기가 다 나왔는데 그건 나라를 걱정해 결정한 의원들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반대 생각을 한 사람을 모두 '사쿠라'라고 한다면 결코 민주화로 갈 수 없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권력 의지도, 자리 욕심도 아니면 지금까지 박 대표를 이끌어 온 마음속의 동인은 무엇입니까.

"책임감인 것 같아요. 총선 때도 잠을 한두 시간씩밖에 못 자고 하루종일 다니려니 너무 힘들었어요. 상황은 참혹하고, 아무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고, TV 연설에서 한번 눈물이 터지니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럴수록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어요. 책임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습니다. 부모님도 책임감으로 사셨던 분들이고, 제 경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도 그 엄청난 빈 자리를 제가 메워야 하는데, 생각하면 엄청나고 황당하지만 책임이라서 했어요."

-용인, 즉 사람을 쓰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그 일을 가장 잘 해낼 사람인가를 최우선으로 봅니다. 지역이나 당내 조화 등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과연 그 일을 잘 해낼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이라고 봅니다."

-젊은 층 등을 중심으로 과연 인간 박근혜의 삶이 행복할까. 개인적으로 불행한 건 아닐까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를 하다 보니 사적 행복과 공적 행복이 따로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는 보람과 개인적 행복과 함께 간다고 봐요. 행복보다는 보람 쪽에 무게가 실리는 거죠. 우리 당이 애쓴 입법이 잘됐을 때도 보람있고, 국민이 반겨주시는 것도 행복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행복한 시절은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 마음의 부담이 없을 때였어요. 편한 옷, 편한 신발에 어깨에 둘러메는 백을 들고 문화유적지 등을 답사하며 노점에서 구운 호떡을 사 먹고, 경치 구경하며 걸어다니는, 아주 사사로운 것이었어요."

만난사람= 김교준 정치부장
정리=강주안.김정하 기자, 사진= 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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