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 기자 블로그] 한국 뒤흔든 영국인 여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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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한국은행 기자실 바로 옆 공보관실에는 밝고 명랑한 영국인 아가씨가 한명 나타났다. 항상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유쾌한 성격을 드러낸다는 그녀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한국 주재 특파원이다.
나이는 30대 중반쯤이고 명함에는 서울 지국장이라고 돼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FT를 대표하는 자격인 것이다. 이름은 애너 파이필드. 빨강색 계통의 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파이필드는 옷색깔에 맞게 입담도 좋아 공보관실 분위기도 금새 화기애애해지는 것같았다(파티션으로 돼 있어 시끌벅적한 대화 내용은 저절로 들려옴).
이날 한은을 방문한 목적은 박승 한은 총재와의 인터뷰. 파이필드는 박 총재와 몇 마디 덕담을 나눈뒤 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고 한다. 10시30분부터 시작돼 한시간여 진행되는 동안 파이필드는 한은의 최대 현안인 외환보유액 운용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박 총재는 "외환보유액이 충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고, FT는 박총재가 ‘외환시장 개입 중단’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고 18일 밤 인터넷판에 보도했다.
파장은 컸다.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 환율이 급락하고, 1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는 환율이 개장하자마자 5.7원 떨어져 999.5원으로 곤두박질했다. 평소 등락폭이 1원 안팎이라는 점에서 이 정도는 쇼크로 분류된다.
이 쇼크를 촉발한 FT의 파이필드 기자는 지난 3월 31일에도 1면 톱으로 5%룰(주식대량보유보고)과 관련해 "외국인들은 '정신분열적 태도'로 보고 있다"고 보도해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금감위는 공보관 명의로 반론보도를 청구해 게재했다.
5%룰은 선진국에서도 모두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이날 문제가 된 중앙은행의 외환시장 개입도 모든 중앙은행이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필요하면 언제든지 시행하는 조치다.
그럼에도 FT는 한은이 외환시장 개입을 중단한다고 보도했다. 외환시장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중앙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은 불가피하다는 원리쯤은 알 것이다.
이날 문제는 박 총재가 금감위는 물론 재정경제부 쪽에서도 접촉을 꺼리는 파이필드 기자에게 인터뷰를 자청했다는 점이다. 금감위에서는 FT가 한국의 경제정책을 정신분열적이라는 식의 기사를 자주 내놓자 파이필드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며 떨고 있는 상황인데 왜 한은 총재가 자청해서 위험을 초래했느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18일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기자실에 전해지자 '반드시 사고가 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19일 아침 기자실에 나오자 마자 환율은 5.7원이나 급락하며 국제 외환시장이 요동쳤다.
일각에서는 재경부에서 박 총재를 내세워 파이필드 기자에게 한국 경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차원에서 인터뷰를 추진하지 않았느냐는 추측도 해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번에 '자승자박'이 된 인터뷰는 박 총재의 개인 퍼스낼리티에 따른 '사고'로 보는 시각도 있다. 워낙 직선적이고 할말을 하는 성격이다 보니 FT 같은 글로벌 언론에 자신의 철학을 피력하려는 차원에서 인터뷰를 자청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앞으로 파이필드 기자가 어떤 뉴스로 또 국내 금융시장을 뒤흔들어놓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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