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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EU간 금리 논쟁 재연 가능성 거론

중앙일보

입력

미국과 유럽연합(EU)간 금리 논쟁 재연 가능성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聯準)는 27일 금리를 다시 내릴 것으로 보인다. 올 들어 벌써 여섯번째다.

FRB 주변에서는 금리를 조정할 때마다 EU도 공동보조를 취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나돈다.

그러나 미국 못지않은 경기침체를 겪고 있으면서도 올들어 지난 5월 10일 한차례 금리 인하에 그친 유럽중앙은행(ECB)의 입장은 다르다. 물가압박 때문에 더 이상의 금리인하를 거부하고 있다.

아직 표면화되진 않았지만 만일 미국과 EU가 금리정책을 놓고 본격적으로 맞붙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역사는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두 거인의 금리공방이 시차를 두고 세계경제에 위기국면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992년 유럽 통화위기, 87년 미국의 주가 폭락 등의 진원(震源)은 늘 미국과 유럽의 금리 논쟁이었다.

◇ 91년 금리 공방, 92년 유럽 통화위기 초래=89년 경기후퇴 조짐을 간파한 FRB는 6월부터 3년 동안 무려 25회에 걸쳐 금리를 떨어뜨렸다. 89년 9.81%였던 연방기금 금리는 92년 9월 3.0%까지 떨어졌다.

문제는 환율이었다.

미국 금리가 떨어지는 만큼 달러화 가치도 하락, 91년말에 달러당 1.75마르크에서 92년9월엔 달러당 1.39마르크까지 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낮은 수치였다.

달러가치 추락을 막기 위해 미국은 독일에 금리인하를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

인플레이션과 통화팽창을 우려해 오히려 금리를 올려야 할 상황이었다. 미국의 요구에 독일은 금리인상 시기를 수개월 늦추는 것으로 답했을 뿐이다.

92년 들어서도 이같은 상황은 계속됐다.

하지만 금리인상 요인이 더 크다며 버티던 독일은 7월 16일 공금리(재할인율)를 연8%에서 8.75%로 오히려 인상해 미국의 의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에서 달러가 빠져나갔고 달러 가치는 더욱 떨어졌다.

◇ 소로스 등장=미국.독일의 금리공방을 파고 든 것이 조지 소로스 등 환투기세력이었다.

당시 통화.경제통합을 앞두고 유럽은 특정 화폐의 환율이 떨어질 경우 다른 나라에서 그 화폐를 사들여 일정 수준을 유지한다는 내용의 환율조정체계(ERM)를 운영하고 있었다.

환투기세력은 독일의 금리 인상으로 몇몇 통화가 과대평가됐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공격하면 독일 등 EU 국가들이 환율 안정에 적극 나설 것으로 확신했다.

9월 둘째 주부터 환투기세력은 영국의 파운드화와 이탈리아의 리라화를 집중적으로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예상했던대로 독일 등 유럽 주요 국가들은 마르크와 달러를 시장에 내놓고 파운드화와 리라화를 사들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어서 파운드와 리라화는 급속하게 떨어졌고, 결국 영국과 이탈리아는 유럽 환율조정체계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소로스의 퀀텀펀드는 최소한 10억달러 이상을 벌었지만 유럽통화제도(EMS)는 붕괴 위기에 처하게 됐다.

◇ 87년 공방은 블랙 먼데이로 끝나=91년부터 시작된 금리 공방이 EU의 파국으로 끝났다면 87년 금리공방은 미국의 주가폭락으로 끝을 맺었다.

87년 당시 미국 경제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5월 무역적자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자 달러가 1주일 동안 7%나 폭락하는 가운데 5%에 육박하는 물가를 우려해야 했다. 전문가들은 FRB의 금리인상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기 위축을 우려한 미국정부는 FRB의 긴축 정책을 반대했다.

대신 일본과 독일의 금리를 내림으로써 미국 경기를 다치지 않고 달러화 하락을 막으려 했다. 일본은 쉽게 동조했지만 독일은 달랐다.

인플레 염려가 컸기 때문이다. 베이커 당시 미국 재무장관은 "독일의 저성장은 문제" 라고 강조하며 독일의 금리인하를 촉구했다. 하지만 독일은 꿈쩍도 하지 않는 가운데 9월 4일 FRB는 마침내 0.25%포인트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베이커 장관은 다시 독일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독일은 오히려 소폭이긴 하지만 금리를 인상하고 말았다.

10월 15일(금요일) 취임 두달째를 맞은 FRB 그린스펀 의장은 다시 금리인상을 시사했고, 베이커 재무장관은 독일의 금리인상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투자자들은 동요했고 이날 하루 다우 주가는 57.61포인트나 폭락했다. 독일의 비협조에 실망한 베이커 장관은 18일(일요일) TV에 출연해 "이번 주가 폭락의 책임은 전적으로 독일에 있다" 며 "달러 가치 하락을 용인할 수도 있다" 고 엄포를 놓았다.

만일 달러 가치가 더 떨어진다면 미국도 미국이지만 세계시장이 흔들릴 것이 뻔했다. '모두 함께 죽자' 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19일 '블랙 먼데이' 가 온 것이다. 도쿄 증시는 시작과 동시에 2.5%가 폭락했고 런던증시는 오전장에서만 10%가 떨어졌다. 이날 하루 미국 증시는 22% 폭락했는데,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 금리공방 재연될까=가능성은 있다.

미국은 경기부양을 위해 EU에 금리 인하를 요구할 가능성이 큰 반면 성장률이 떨어지고 있기는 해도 EU는 전통적으로 성장보다 안정을 택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난 5월 EU 회원국들의 인플레율은 3.4%까지 올라, ECB의 2001년 중반 목표치 2%를 크게 초과한 것은 물론 최근 8년 사이 최고 수준에 달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내년부터 유로화가 본격 통용되면 물가가 크게 오를 것이라는 의견이 중론이다.

최근 빔 도이센베르흐 ECB 총재는 "ECB의 주요 업무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 이라고 말해 금리 인하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영국도 변수다. 파운드화 약세가 계속되자 중앙은행인 영국은행(BOE) 에디 조지 총재는 "파운드화가 급락할 경우 금리를 대폭 올리겠다" 고 경고하기도 했다.

EU 회원국이면서 유럽통화연맹(EMU)에 가입하지 않은 영국의 '금리 대폭 인상 발언' 역시 EU의 금리인하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국내 전문가들도 미국의 경기침체가 심화할 경우 금리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LG경제연구원 강선구 부연구위원은 "미국은 지속적으로 EU에 금리인하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지만 EU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 이라며 "역사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EU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반발하는 경향이 있어 더더욱 어려울 것" 으로 내다봤다.

이재광 기자 im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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