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과학 교과서 부터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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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장을 과시한 일본 축구팀의 비결은 두꺼운 선수층에 있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잔디구장을 건설하는 등 공을 들인 결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웬만한 동네에는 잔디 운동장이 있어서 자주 학교 대항 축구시합이 열리고 부모들도 산보 삼아 응원에 나선다.

그나마 손바닥만한 운동장도 제대로 없는 우리의 도심학교와 비교하면 부럽기 짝이 없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이 축구를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자연히 두꺼운 선수층이 형성되고 그 중에서 가끔 펠레 같은 선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과학계를 바라보면 과학 인구층이 얼마나 두꺼운지, 직접 과학에 종사하지는 않더라도 과학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해서 과학을 공부한다고는 하나 그 중에서 얼마가 진정 과학을 즐기며 공부하고 있나 의문이다.

그래서 기초과학이 중요하고 육성할 필요가 있다면 이제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과학을 즐길 수 있도록 과학교육 개선에 눈을 돌려야 한다.

우리나라 교육의 전반적인 취약점은 가르치는 내용의 중요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암기를 강요하는 데 있다.

그래서는 더 배우고자 하는 의욕도 안생기고, 마지못해 하는 일에서 창의력이 발휘될 리 없다.

똑같은 내용을 가르쳐도 듣는 사람이 귀가 번쩍 뜨이게 주의를 사로잡는 방안은 없을까□ 내 전공분야인 화학에서 일례를 찾아보자.

산-염기는 화학의 기본이다. 모든 교과서는 산과 염기의 정의를 내리고, 산과 염기의 예를 들어 중화반응을 설명한다.

자칫하면 암기의 대상이 돼버릴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산-염기가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물질을 특정 짓는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생명현상의 핵심 물질인 DNA의 두가지 중요한 특성은 바로 산과 염기인 것이다. DNA가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의 약자인 것을 보면 DNA가 일종의 산인 것을 알 수 있다.

요즘은 일간신문에서도 인간의 유전정보는 30억개의 염기서열로 DNA에 저장돼 있다는 기사를 흔히 접한다.

나는 지금 한글 자모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생명은 40억년 동안 단 네가지 염기를 사용해서 생명의 정보를 기록해 왔다.

염기라는 화합물은 어떤 원자들로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기에 염기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왜 생명은 네가지 염기를 사용할까? 무엇이 염기를 사용하는 DNA를 다른 한편으로는 산이 되게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한 물질 안에 산과 염기가 같이 존재할까? 외계에 생명이 있다면 거기에서도 산과 염기라는 원리가 핵심적으로 작용하고 있을까? 등의 질문을 통해 산과 염기의 개념과 중요성을 다루면 흥미를 잃지 않고 산-염기를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DNA의 특성을 규정짓는 산-염기의 중요성은 DNA의 중요성이 인식될 때 새롭게 부각된다. 가장 권위 있는 과학 저널의 하나인 네이처의 편집장을 오래 지낸 매독스는 "지적인 면에서, 또 실제적인 면에서 1953년에 웟슨과 크릭이 발견한 DNA 이중 나선구조의 중요성은 과학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지동설은 인간이 우주의 구조와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찾아가는 데 첫 발걸음을 내디딘 데 불과하다면, 이중 나선구조의 발견은 단숨에 생명의 가장 깊숙한 비밀을 드러냈고, 이는 곧장 유전공학이라는 엄청난 실용분야로의 길을 열었다는 말이다.

46억년 지구의 역사 중 40억년 생명의 역사에서 염기는 핵산 속에 유전정보를 기록해왔고 진화의 도구 노릇을 감당했다.

하나의 DNA를 만들기 위해 6억년의 세월이 흐르고, 산과 염기는 이중나선 안에서 조화를 이뤘나 보다.

어릴 때 동네축구에서 한 골을 넣은 감격은 평생 간다. 초.중.고등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면서 크고 작은 감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내용을 구성하고 자료를 개발하고 나눠 사용하는 일은 기초과학의 육성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첩경이다.

김희준 서울대 교수 ·분석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