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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600만 명 죽음으로 몬 나치의 광기 이 책이 시작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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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가장 위험한 책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 지음
이시은 지음, 민음인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는 중·고 교과서에도 나오는 친숙한 책이다. 고대 로마시대 라인강 동쪽에 살던 여러 부족의 삶과 풍속을 소개한 30쪽 분량의 얇은 민족지다. 기록이 역사를 만든다는 전제에서 보면 서기 98년에 나온 이 책이 게르만족을 역사에 데뷔시킨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탈리아 학자 아르날도 모밀리아노에 의해 ‘역사상 가장 위험한 책 100권’ 중에서도 상위권에 올랐다. 미국 하버드대 고전학 교수인 지은이는 책 내용은 그렇지 않은데 이를 정치적으로 곡해하고 이용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강조한다. 그는 독일 민족주의자들과 게르만 우월주의를 내세운 나치는 물론 민족주의 형성기인 근대부터 현재까지 거의 전 유럽 지성이 여기에 가담한 혐의가 있음을 추적해낸다.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15세기 독일의 한 수도원 도서관에서 발견된 이 책은 이후 450년간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 활용됐다.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에 대해 표현한 “단순하고 용감하며 충성스럽고 순수하며 정의롭고 명예롭다”라는 수식어가 발단이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이 내용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거나 오독해 민족주의 고양에 써먹었다.

 이 수식어는 통일을 기원하던 근대 독일인을 열광시켰다. 민족국가에는 공통된 과거, 공유된 문화, 모국어가 필요했는데 이 책은 앞의 두 가지를 제공해줬다. 민족주의자들은 이 책에 표현된 게르만족의 특성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민족상으로 여겼다.

 이를 결정적으로 왜곡한 게 나치다. 나치는 이 책에서 게르만 우월주의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히틀러는 감옥에서 쓴 자신의 자서전에 ‘나의 투쟁’이란 제목 대신 ‘게르만 혁명’이란 제목을 붙일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더욱 문제는 나치가 이를 실제 정책을 만드는 데도 활용했다는 점이다. 나치 인종차별법의 하나인 ‘독일인 혈통 및 명예 수호법’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가 이민족과의 결혼을 금지했을 것이라는 믿음에 따라 유대인과 독일인 간의 결혼을 금지했다. 민족차별을 합법화한 이 법률은 홀로코스트의 서막이 됐다.

 인간의 오독에 의해 30쪽 분량의 라틴어 책자가 600만 명의 죽음을 불렀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오도된 민족주의의 광기 어린 얼굴이 생생히 드러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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