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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남겨놓은 100년 야만 … 감옥 서신검열 없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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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8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서울대병원에 강제 수감됐을 당시 서신 검열을 피해 노란 종이에 못으로 눌러쓴 편지. 신문 기사와 사설, 칼럼 등을 넣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복역할 때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앙포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후인 2009년 10월.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8년 서울대병원 특별 감옥병동에 수감됐을 당시 못으로 눌러쓴 옥중서신 원본을 공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서신 검열을 피해 과자 포장지 등에 몰래 메모를 적어 가족과 지인들에게 전했다. 그는 지인들만 알 수 있는 영어 이니셜이나 암호를 사용해 메모를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80년 청주교도소 수감 당시 쓴 편지들을 묶어 84년 『김대중 옥중서신』을 출간했다. 정치·경제·사회·종교 등 각 분야에 걸친 견해가 담긴 편지들은 검열을 피해 완곡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쓰여졌다. 일부에선 20세기 초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 비견하기도 한다. 독재정권 시절 사상의 통제 수단으로 악용됐던 서신검열제도가 역설적이게도 시대의 명저(名著)를 낳은 셈이다.

서신 검열을 했다는 뜻의 ‘검열필’ 도장(빨간 원 안)이 찍혀 있다. [중앙포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도 서신 검열 시대의 명문으로 꼽힌다.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는 20년 동안 복역하면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지를 적어 가족들에게 보냈다. 아름다운 문장과 글씨체, 깊이 있는 사유를 담은 글들은 98년 책으로 출간된 후 10년 넘게 ‘스테디 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교도소 수형자들이 외부에 편지를 보낼 때 봉투를 열어둔 채 제출하게 하는 서신검열제도가 100년 만에 폐지된다.

 이 제도는 1912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감옥령 시행규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야수적인 감옥제도’로 비판받는 조선감옥령에 담겼던 서신검열제도는 정부 수립 후 조선감옥령 시행규칙이 행형법(현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으로 대체된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수형자들의 증거 인멸, 범죄 교사 등 불법적인 통신이나 물건 반입을 막기 위해 그대로 유지됐다.

 법무부는 20일 수형자가 외부로 편지를 보낼 때 예외적인 경우에만 봉함하지 않은 상태로 교도관에게 제출하게 하고, 예외적으로 검열할 경우 수형자에게 통보토록 하는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 및 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고 밝혔다. 지난 2월 헌법재판소가 서신검열제도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린 데 따른 것이다.

 마산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신모씨는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 청원을 위해 봉함 상태로 편지를 제출했다가 교도소 당국에 의해 거절당하자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수형자의 모든 편지를 무봉함 상태로 제출해 사실상 검열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며 위헌 결정이유를 밝혔다.

 법무부는 그러나 ▶마약·조직폭력 사범이거나 ▶같은 교정시설에 수용 중인 다른 수형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경우 ▶교도소 내 규율위반으로 조사 중이거나 징벌집행 중 다른 수형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경우 등은 봉함하지 않은 채로 편지를 제출하도록 예외 규정을 뒀다.

 법무부 관계자는 “수형자라 할지라도 인권을 최우선해야 한다는 헌법정신과 헌재 결정에 따라 서신검열제도를 폐지키로 했다”며 “불법적인 통신이나 물건 반입 등 부작용은 보완책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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