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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찍었다, 삼각코스 한 변 완성했다, 이제 동쪽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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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3 산시(陝西)성에 있는 2000년 고도 시안(西安)엔 명대에 축조된 성곽이 원형대로 잘 보존돼 있다. 성벽 위가 넓어서 마치 서울의 내부순환도로처럼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순례할 수 있다.

시안(西安)에선 성벽 위를 자전거로 달릴 수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성벽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운치 있을 텐데 자전거라니. 만리장정에 가장 부합하는 중국 고도(古都) 기행일 것 같다. 남문으로 페달을 밟았다. 시안은 중국 8대 고도 중 통일왕조의 수도 자리를 지켰던 기간(1077년)이 가장 긴 도시다. 통일왕조를 포함해 17개 왕조가 1200여 년간 시안에서 지지고 볶았다면 시안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격조 있고 고풍스러운 도시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년의 궁성은 없었다. 2000여 년 전 진시황의 아방궁도, ‘서(西)로마, 동(東)장안’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번성했던 한나라의 성(城)도, 세계 최초로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한 실크로드의 기점인 당나라의 장안성도 모두 폐허다. 중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새로 왕조를 세우면 기존의 궁성을 깨끗이 불태우고 근처에 새집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 것 같다. 재건축이나 재개발의 개념이 없다. 겨우 땅속 5m 밑에 아슬아슬하게 숨어 있던 진시황릉의 병마용도 그전에 발각됐으면 모두 흙더미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지금 내가 오르려고 하는 성벽도 와서 보니 비교적 최근인 명대에 건축된 것이다. 특이하게도 청나라 황제들은 전(前) 왕조의 성들을 부수지 않았다. 베이징에 남아 있는 자금성도 명대에 건축된 것이었다.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한족 문화에 동화되고자 했던 여진족 황제들이 한족보다 더 한족의 문화를 보호한 것 같다.

1 성벽 위에서 바라본 시안의 시내 풍경

남문의 검표원이 막아섰다. 자전거는 끌고 올라갈 수 없고 성벽 위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자전거와 짐을 잠깐 놔두고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검표원은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옆에 있는 관광안내소 여직원은 ‘짐은 맡아줄 수 있지만 자전거는 자전거 보관소에 맡기고 오라’고 한다. 자전거 보관소가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또 곧이곧대로 하기에 나는 이미 융통성 있는 중국의 맛을 본 터. 30분만 갔다 올 테니 하면서 계속 졸랐다. 그 사이 나를 응대하는 사람은 5명으로 불어나 5대 1의 실랑이로 발전했다. 스스로 중국어가 많이 늘었다고 느꼈다. 중국어로 억지까지 쓰고 있지 않은가.

한국에서였다면 실랑이가 길어지면 어느 한쪽에서 언성을 높이고 결국 “나이가 몇 살이야” “왜 반말이야” 하면서 옥신각신 언쟁으로 비화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같은 음조로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다. 외국인이어서 좀 더 예의 있게 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쉽게 달아오르지 않는 성격인 것 같기도 하다. 이럴 시간에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그럴 시간이면 자전거를 맡기고 오라고 한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들에게 성벽으로 올라가는 다른 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까 거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거라면서 동문을 가르쳐준다. 성벽 안쪽의 길을 타고 동문에 도착하자 잘생긴 젊은 남자직원이 검표하고 있었다. 중국여행의 팁인데 잘생긴 남자들이 친절하다. 그는 관광안내소로 나를 인계했고 안내소에서는 뒤편 휴게실에 자전거를 들여놓았다. 정확히 내가 그리던 ‘아름다운’ 광경이다. 따뜻한 찻물을 담아주고 길도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중국에서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원칙을 지키는 사람도, 융통성 있는 사람도 모두 있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회심의 미소를 만면에 띠며 성벽으로 올라갔다.

성벽 위 담장은 2차로나 다를 바 없다. 탱크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성벽 위에만 몇만 명이 올라와 동시에 수비할 수 있을 것 같다. 높이도 12m나 돼서 주변의 4, 5층 건물이 아래로 보인다. 근데 동문에서 시작해 북-서-남의 순으로 3개의 모퉁이를 돌았는데 동문이 나오지 않는다. 3개가 아니라 4개, 5개의 문을 돌아도 나오지 않는다. 외길이어서 도중에 길 잃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 도돌이표 같은 음표에 걸린 게 아닐까 온갖 생각이 든다. 실은 중간에 옹성 비슷한 망루를 지나치면서 문을 지나쳤다고 착각한 데다 생각보다 성벽 길이가 길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그들에게 성벽으로 올라가는 다른 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까 거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거라면서 동문을 가르쳐준다. 성벽 안쪽의 길을 타고 동문에 도착하자 잘생긴 젊은 남자직원이 검표하고 있었다. 중국여행의 팁인데 잘생긴 남자들이 친절하다. 그는 관광안내소로 나를 인계했고 안내소에서는 뒤편 휴게실에 자전거를 들여놓았다. 정확히 내가 그리던 ‘아름다운’ 광경이다. 따뜻한 찻물을 담아주고 길도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중국에서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원칙을 지키는 사람도, 융통성 있는 사람도 모두 있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회심의 미소를 만면에 띠며 성벽으로 올라갔다.

성벽 위 담장은 2차로나 다를 바 없다. 탱크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성벽 위에만 몇만 명이 올라와 동시에 수비할 수 있을 것 같다. 높이도 12m나 돼서 주변의 4, 5층 건물이 아래로 보인다. 근데 동문에서 시작해 북-서-남의 순으로 3개의 모퉁이를 돌았는데 동문이 나오지 않는다. 3개가 아니라 4개, 5개의 문을 돌아도 나오지 않는다. 외길이어서 도중에 길 잃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 도돌이표 같은 음표에 걸린 게 아닐까 온갖 생각이 든다. 실은 중간에 옹성 비슷한 망루를 지나치면서 문을 지나쳤다고 착각한 데다 생각보다 성벽 길이가 길었기 때문이다.

2 2000여 년 동안 땅 밑 5m 갱도에 묻혀 있던 진시황릉의 병마용. 무술시범을 보이는 것처럼 생동감 있는 모습이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기 이전에도 농부들은 밭을 갈다가 병마용을 발견하곤 했지만 제사를 지내고 다시 묻어뒀다고 한다.

13.74㎞.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한대의 장안성은 둘레가 35.56㎞였다고 하니까 남아 있었으면 제법 자전거 탈 맛이 났을 것이다. 명대의 성벽이라도 650년이 넘었다. 지금까지 자전거로 다닌 길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특별한 도로일 것이다. 바닥에 벽돌 크기의 포도(鋪道)가 울퉁불퉁 깔려 있어서 주행이 순탄치 않았지만 시안에서 둘러본 어느 유적지보다도 역사 속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성벽 밖에 밀집한 낡은 아파트 단지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여기서 이러고 있는 내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을 관두고 상하이부터 자전거를 타고 와서 성벽을 자전거로 돌고 있다. 꿈꿔오던 일이기는 하지만 믿기지 않는 일이다. 경제적인 문제나 사고 위험 등 다른 것을 다 제쳐 놓더라도 체력이 괜찮을지 불확실했다. 이번 만리장정은 상하이~시안~베이징을 세 꼭짓점으로 중국 대륙에 삼각형을 그리는 여정이다. 시안까지 온 것은 삼각형의 한 변을 완성했다는 것 이상의 수확을 의미했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이 정도의 규모로 자전거 여행을 한 게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중국도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쳐왔지만 속으로는 이게 혹시 나이 듦에 대한 무망한 저항, 더 나쁘게 말해서 세월의 흐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발악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 해 보니 피로해소 속도가 늦어진 것 외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역시 해봐야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약간 흥분돼서 마이크로 블로그 서비스인 미투데이의 친구들을 향해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던 나로 돌아갔다”고 소리치는 치기를 부렸다.

내게 시안은 총소리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것은 1936년 12월 12일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러 시안에 온 장제스(蔣介石)를 체포·연금한 군벌 장슈에량(張學良) 군대의 총소리였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항일전쟁을 위한 국공합작이 이뤄지고 기사회생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결국 13년 뒤 중국을 호령하게 된다. 12월 12일은 한국에서도 79년에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하나회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일으킨 날이어서 기억이 중첩됐다. 그 총소리로 잠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처럼 보였던 시안은 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병마용이 발견되면서 실크로드 이후 비로소 다시 세계인들의 발길이 북적대는 도시가 됐다.

원래 시안은 그렇게 쉽게 잊힐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시안은 대중국의 시작이었다. 친링산맥에서 시안 쪽을 바라보면 시안을 수도로 한 진(秦)이 전국시대를 끝장내고 중국을 통일한 지리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장성을 쌓은 듯 직각으로 솟은 친링의 지맥을 옆구리에 끼고 망망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그 안에 위수(渭水)가 구불구불 대지를 적시고 지나간다. 무학대사급 지관이 아니라도 광활한 이 터에 대중국 통일왕조의 도읍지를 정도(定都)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풍수지리나 도시설계를 알 바 없는 원시인조차 이곳에 군집했을 정도로 이 분지의 이점은 분명하다. 은신과 전망을 모두 확보할 수 있으면서도 먹거리는 풍부했을 것 같다.

이 분지의 남쪽에 있는 란티엔(藍田)현에서는 홍적세에서 구석기 초기에 걸치는 직립인의 화석이 64년 발견됐고 이 화석의 주인공을 호모 란티엔(Homo lantienensis)이라고 부른다. 최대 115만 년 전에 살았던 란티엔 원인(猿人)의 후손이 중국인이라고 하기에는 시간적 거리가 영원에 가까울 만큼 멀다. 하지만 어쨌든 이 대지에서 삶이, 그리고 문명이 움틀 수 있다는, 그래서 중국의 문명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전래돼 온 것이 아니라 자생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곳이 바로 위수평원,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대로 하면 관중(關中)평원이다. 평원을 둘러싼 첩첩산중 협곡에 네 개의 관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 북쪽 다산관(大散關), 서쪽 샤오관(蕭關), 동쪽 통관(潼關), 남쪽 우관(武關) 네 개의 관문은 궤짝에 달린 자물쇠와 같아서 이 관을 열지 못하면 관중평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진은 내부 분열이 일어나 안에서 열어주지 않는 이상 쉽게 들어오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평원에 위치한 반면, 바깥으로는 동서남북 어디든 우당탕 한달음에 밀고 내려갈 수 있고 그렇게 중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보다 넓고 비옥한 대지를 따라 왕도가 분지의 문턱을 넘어 동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시안은 도리어 경제적인 의미에서 난공불락의 섬으로 고립돼 갔다.

나는 봄날의 소풍 같았던 성벽 순례를 끝으로 방향을 극적으로 바꿔 뤄양(洛陽)과 카이펑(開封) 등 왕도를 따라 동진을 시작한다. 옛 진의 병사들처럼 한달음에 화북평원을 향해 내달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중국이 그렇게 간단한 나라일까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몸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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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글·사진 =홍은택『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저자 hongdongzi@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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