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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고 튼튼하고 편하고 멋진 도시 풍경의 소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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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호 14면

필리프 스타크가 디자인하고 이탈리아의 카르텔이 생산하고 있는 루이 고스트 의자. 프랑스 루이 16세 때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의자를 플라스틱을 이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편의점 밖 흰색 또는 파란색이나 붉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맥주 한잔 나누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편의점으로서는 크게 부담스러운 서비스도 아니다. 플라스틱 의자는 기껏해야 몇 천원이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플라스틱 의자가 불편하거나 금방 망가지는 것도 아니며 보기 흉하지도 않다. 나름 유기적인 형태로 디자인됐고 팔걸이도 있다. 이만큼 효율적이고 유용한 물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김신의 맥락으로 읽는 디자인 <10>플라스틱 의자

48년 첫 등장 … 이탈리아서 본격 개발
천연수지의 대용품인 플라스틱은 19세기 중반 발명됐다. 생활용품에 광범위하게 쓰인 최초의 플라스틱은 1907년 리오 베이클랜드 박사가 개발해 특허출원한 베이클라이트다. 옛날에는 일본식 발음으로 ‘뻬꾸라이트’라고 발음했는데, 사람들은 이 말에서 반질반질한 표면 질감을 떠올렸다. 그런 특성 때문에 베이클라이트는 20~30년대 라디오·전화기 같은 가정용품을 고급스럽게 표현하는 재료로 각광받았다. 30년대부터는 천연고무를 대신할 인조고무로서 합성수지 개발 연구가 가속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그 수요가 폭발하자 독일과 미국은 인조고무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더 우수하고 다양한 합성수지들이 개발돼 수많은 군사기기에 적용됐다.

전쟁이 끝나자 이 재료들은 가정 속으로 들어왔다. 대표적인 것이 48년 얼 C 터퍼가 폴리에틸렌을 이용해 만든 주방용 저장용기다. ‘터퍼웨어’라고 이름 붙인 이 저렴하고 깔끔한 용기는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하우스 뷰티풀’이라는 잡지는 ‘39센트의 예술’이라는 특집기사를 만들 정도였다.
가구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미국의 찰스와 레이 임스 부부는 48년 좌판과 등받이 팔걸이가 하나로 된 DAR 의자를 디자인했다. 처음엔 유리섬유였다가 나중에 플라스틱으로 생산했다. 이 의자는 유럽 디자이너들에게 자극을 줬고, 플라스틱 의자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플라스틱이 의자 재료로 환영받게 된 또 다른 배경에는 전후 유럽의 재건과 경제부흥이 있었다. 미국의 마셜플랜에 따른 대대적인 원조와 각국의 경제재건 의지로 50년대 유럽은 역사상 최고의 경제부흥기를 맞는다. 소비의 폭발이 일어났고 주머니가 두둑해진 소비자들은 늘어난 부를 과시할 수 있는 멋지고 다양한 취향의 디자인을 찾게 됐다. 특히 크고 화려한 자동차로 대표되는 미국의 상품들은 풍요의 상징이 돼 유럽인의 마음을 빼앗고, 유럽 제조업체들은 이런 스타일을 상품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현대예술에서는 헨리 무어와 한스 아르프로 대표되는 유기적인 곡선의 추상조각이 전성기를 맞는다. 이 또한 당시 디자이너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시대 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한 나라가 이탈리아다. 전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로 전락했던 이탈리아는 세계시장에 수출할 상품을 개발하면서 디자인의 방향을 세련과 고급, 예술성으로 바꾼다. 여기에 플라스틱이 큰 역할을 했다. 북유럽만큼 나무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이탈리아의 가구 제조업체들은 저렴한 재료인 플라스틱으로 대량생산할 수 있는 의자들을 개발한 것이다.

S자 다리 의자, 바람 의자, 속 빈 의자…
액체 상태에서 금형 틀에 넣어 고체 형태를 추출해 내는 플라스틱은 다른 어떤 재료보다 자유롭게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복잡한 형태도 나사나 용접 없이 한 번의 사출성형으로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원하는 색상을 쉽게 표현할 수 있고 투명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생산비용이 싸다는 것은 최대 장점이다. 이런 장점들을 활용하고 싸구려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아름다운 비례가 있고 개성이 뚜렷한 의자를 선보인다.
그 첫 번째 의자는 카르텔에서 생산됐다. 화학자인 줄리오 카스텔리는 49년 플라스틱 제조회사를 만들고 자동차 액세서리와 주방용품을 생산하다가 54년 마르코 자누소의 디자인으로 아이들을 위한 쌓을 수 있는 의자를 개발해 64년 처음 생산을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비코 마지스트레티는 매끈한 표면에 강렬한 색상의 셀레네(Selene) 식탁 의자를 디자인한다. 단순하지만 엉덩이와 등받이가 미묘한 곡선을 그리고 몸은 편안하게 지탱할 수 있게 했다. 구조를 강화하고자 다리는 밑에서 보면 S자 형태로 꼬여 있다. 이런 디자인이야말로 플라스틱의 장점을 잘 활용한 것이다.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개척한 플라스틱 의자는 공예 전통을 존중하고 지역적 특성 때문에 나무 의자를 고집하는 북유럽에까지 파고든다. 덴마크 디자이너 베르너 판톤은 S자 형태의 캔틸레버 의자를 59년에 디자인하지만 기술 부족으로 68년에 가서야 비트라에서 생산하게 된다. 어떠한 이음매도 없이 한 번에 사출성형이 되는 이 의자 역시 플라스틱이 아니면 생산할 수 없는 기묘한 형태다.

60년대는 일회성과 유희를 특징으로 하는 팝 스타일 디자인이 큰 트렌드를 형성한다. 여기에서도 플라스틱은 최적의 재료로 활용된다. 바람을 불어 부풀리는 ‘바람 의자’ 같은 독특한 의자가 좋은 예다. 싸구려 플라스틱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상품으로 탈바꿈시킨 이탈리아의 가구회사들은 최근에는 속이 비어 더욱 가벼워진 플라스틱 의자를 단 2분 만에 생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우리 생활 속에서 플라스틱 의자는 저렴한 비용으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 현대 도시의 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김신씨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7년 동안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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