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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들 열광한다, 이 만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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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입사 첫날 늦잠을 잔 장그래, “처음부터 곤마라니!!” 외치며 뛴다. ‘곤마(困馬)’는 살아남기 어려운 돌을 뜻하는 바둑용어. [사진 위즈덤하우스]
윤태호 작가는 스무 살 무렵 만화가가 되고 싶어 서울에 올라와 3개월여 노숙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남산에 올라 서울의 빌딩숲을 내려다보면서, 저렇게 건물이 많은데 내가 들어갈 곳 하나 없나 했어요.” 당시 느낀 감정이 『미생』에도 그대로 담겼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도시의 밤은 환하다. 빌딩 창문 하나하나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이 모여 어둠을 쫓아낸다. 저 창문 안에는 과연 누가 있을까. 그 무슨 중차대한 일이 남아 아직도 사무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나.

 만화 『미생』(위즈덤하우스)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했다. 불 꺼지지 않는 빌딩에서 자신만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샐러리맨들. ‘누군가에게는 톱니로, 개미로, 부대로 불리는’ 그들의 삶에 바싹 현미경을 들이댄 관찰기다.

 올해 초부터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 중인 웹툰 ‘미생’ 1부가 최근 2권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2007년 『이끼』로 각종 만화상을 모두 휩쓴 윤태호(43) 작가의 신작이다. 열한 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바둑판 위에서 7년을 보내지만, 입단에 실패하고 사회에 내쳐진 주인공 장그래. 그가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종합상사에 ‘낙하산’으로 입사해 ‘회사’라는 새로운 게임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누구나 각자의 바둑을 두고 있다

만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둑이다. 장그래가 바둑 연구생 출신으로 설정된 만큼, 바둑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요한 상징으로 쓰인다. ‘세기의 승부’로 불리는 1989년 조훈현 9단과 중국 녜웨이핑 9단의 응씨배 결승 마지막 경기를 한 수 한 수 소개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단행본에는 중앙일보 박치문 기자가 쓴 기보 해설도 담겼다.

 “바둑은 주인공 장그래의 사고 체계를 형성하는 기본 구조가 되죠. 하지만 바둑에 사회생활의 비기(秘器)가 숨어 있다는 식으로 과장하지는 않으려 했습니다.”

 대기업 상사에 입사한 장그래는 눈이 빨간 워커홀릭 오 과장, 촉이 좋은 김 대리와 팀을 이룬다. 하지만, 남극에 냉장고를 파는 식의 멋진 성공사례 같은 건 없다. 매회 스토리를 끌어가는 건 포스트잇을 잘못 사용해 일어난 갈등,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계속 마주쳐야 한다는 막막함 등 회사생활의 사소한 희로애락이다.

 회사생활을 해 본 적이 없어 “직급과 직책의 차이가 뭔지도 몰랐던” 작가는 실제 상사직원들 몇 명을 대상으로 철저한 취재를 거쳤다. 유독 30~40대 샐러리맨들이 이 작품에 열광하는 건 이런 디테일의 힘 덕분이다.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털어놓는 자기고백적 댓글이 많습니다. 저에게는 그게 또 다른 정보가 되죠. 실제로 장그래처럼 입단에 실패하고 취업을 준비 중이라는 학생이나 수년째 고시에 매달리다 그만뒀다는 회사원들에게 ‘장그래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메일을 받고 울컥하기도 했죠.”

 ◆우리는 모두 미생이다

가짜 같은 성공담 없이도 ‘만화적 재미’를 주기 위해 작가는 철저하게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장그래가 뛰어난 통찰력이나 직감으로 어떤 임무를 완수한다는 식의 픽션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그래가 고속승진을 해 사장이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사회생활의 룰(Rule), 제도라는 부분은 철저히 현실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원칙을 작품이 끝날 때까지 지켜나갈 생각이다.

 생소한 제목 ‘미생(未生)’은 바둑용어다. 바둑에서는 두 집을 만들어야 ‘완생(完生)’이며, 두 집을 만들기 전에는 죽음과 삶이 결정되지 않은 돌, ‘미생’으로 불린다.

 “주인공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모두 미생 아닐까요. 독자들이 저보다 사회생활의 고수인만큼, 저는 제 만화를 통해 그들에게 완생을 위한 어떤 교훈이나 희망을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삶을 목격하고 이를 기록한 제 만화를 보면서 스스로 힘을 얻고, 발전을 위한 동력을 찾아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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