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돈 찍어 영세업자 돕는다 은행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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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13일 오전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금통위는 시장의 예상과 달리 기준금리를 내리지 않았다. [박종근 기자]

한국은행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저신용·저소득 영세 자영업자를 구제하기 위해 13일 ‘저금리 전환대출 지원’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국은행이 은행에 주는 돈(총액대출한도)을 1조5000억원 늘려 이를 저소득·저신용자 지원에 쓰도록 하는 파격적인 방안이다. 사실상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저소득·저신용자 지원에 나선 셈이다. 이는 정부의 지원 요청을 한은이 받아들인 것으로 정부는 최근 발표한 재정 투입 계획에 맞춰 한은에 별도의 소외·취약 계층 지원 방안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13일 전체회의를 열고 총액대출한도를 현재의 7조5000억원에서 9조원으로 1조5000억원 증액하기로 했다. 늘어난 금액은 고금리를 적용받는 영세업자가 저금리의 대출로 갈아타는 데 사용될 계획이다. 캠코와 신용회복기금이 100% 보증을 해주기 때문에 은행은 떼일 염려가 없다.

 대상은 신용등급 6~10등급의 저신용자로, 연 소득 4500만원 이하, 연 20% 이상의 고금리 대출을 받고 있는 사람이 싼 금리로 갈아타는 용도로만 지원받을 수 있다. 대출한도는 3000만원이며, 최장 6년 만기로 연 8.5~12.5%의 금리가 적용된다. 한국은행 장한철 금융기획팀장은 “약 15만 명의 이자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며 “1인당 6년간 약 1300만원의 이자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은이 이처럼 특정 계층 지원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1989년 12·12 투신사 무제한 주식매입 조치, 99년 외환은행 증자, 2006년 신용불량자 구제 정도가 과거 예다. 모두 부실 위험이 높아 당시에는 금융지원이 불가피했던 대상들이다. 이는 그만큼 최근 영세 서민의 삶이 팍팍해졌다고 한은이 판단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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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론도 만만찮다. 재정을 투입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해결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경상대 경제학과 김홍범 교수는 “한국은행은 거시적인 물가·금융안정을 추구하는 곳이지, 미시적으로 특정 계층을 위해 정책을 펴는 곳이 아니다”라며 “한은에 발권력과 함께 독립성을 부여한 이유”라고 말했다. 김중수 한은 총재도 처음엔 정부의 요구에 부정적이었으나 거듭되는 강력한 요청에 결국 한발 물러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금통위는 또 시장의 예상을 깨고 기준금리를 연 3%로 동결했다. 이는 최근 6조원에 달하는 정부의 추가 경기부양책이 나온 만큼 세계 주요국의 통화정책과 국내 시장 흐름을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정부가 돈을 푸는 상황에서 한은의 금리 인하 카드까지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면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우려도 담겼다.

 하지만 이젠 ‘상저하저’도 아닌‘ 상저하추’(하반기에 더 추락)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국내 경제가 시름을 하는 상황에서 금리 인하 타이밍을 놓쳤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 최근 금융투자협회가 채권시장 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절반이 넘는 53.6%가 금리 인하를 예상했었다. 그만큼 금리 인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한국투자증권 이정범 연구원은 “현재 한국경제는 수출이 부진하고 소비와 설비·건설투자가 모두 부진해 성장동력이 없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경기둔화가 심화될 위험이 크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오는 10월 수정 경제전망 발표에 맞춰 한은이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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