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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기술, 받는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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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영종
정치국제부문 차장

태풍 볼라벤은 북한엔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6~7월 폭우로 사망자 169명에 400여 명이 실종(북한 발표)되는 큰 피해를 본 데 이어 이번 태풍에 직격탄을 맞았다. 볼라벤의 관통으로 평양은 물론 황해도·평남 지역과 동부 쪽인 함남과 강원도에도 적지 않은 피해가 났다는 보도다. 후속 태풍 덴빈에 북한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수해와 태풍은 한국과 국제사회에 대북 지원이란 늦여름 숙제를 던진다. 1995년 대수해 이후 거의 해마다 되풀이해 온 공식이다. 올해도 국제적십자사연맹(IFRC)과 유엔 산하 기구 등이 나섰고, 대한적십자사와 우리 민간단체도 부산하다. 정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연이은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깐깐한 대북정책을 강조해 왔지만 최근 대북 지원 압박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주의 지원 호소에 연평도 포격 등 군사도발과 대북정책의 원칙을 내세워 봤자 군색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108번뇌에 대북 지원 번뇌를 하나 더 얹고 산다”는 통일부 정책 담당자의 말은 그런 고심을 대변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북한 김정은 정권의 태도다.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면서도 수해복구에 발벗고 나선 모습은 아닌 듯하다. 그러다 보니 사망·실종자를 부풀렸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지난해 여름 대북 지원을 챙기려고 대동강 수해 사진을 과장·조작했다 들통난 전력 때문에 신뢰를 잃은 것이다. 김정은이 수해현장을 찾았다는 보도도 없다. 이달 초부터 10만 명 규모의 아리랑 공연을 강행 중이고 29일 밤에는 평양에서 청년절 기념 횃불행진을 여는 등 체제 선전 행사에 몰두하고 있다. 넉 달 전 김정은이 첫 공개 연설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며 민생 챙기기를 공언한 것과는 딴판이다. 요즘 김정은은 군부대를 잇따라 찾아다니며 “괴뢰 악당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리라”는 식의 극언을 쏟아내고 있다.

 물론 김정은으로서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클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달리 대북 지원 챙기기가 녹록지 않다는 점에서다. 지난해 수해 때 북한은 “쌀과 시멘트를 통 크게 지원해 달라”고 손을 벌렸지만 정부는 빼돌릴 우려가 있다며 거절했다. 대신 영·유아용 영양식 140만 개와 라면 160만 개 등 50억원 규모의 지원을 준비했다. 북한은 거절했다. 주민을 생각했다면 받아들이는 게 당연했지만 그보다는 남측과의 기싸움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곤경에 처한 사람이나 국가를 돕는 건 인지상정이다. 동포를 돕자며 대북 지원을 호소하는 종교·민간단체의 주장도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정책에는 따뜻한 가슴과 함께 냉철한 머리가 뒤따라야 한다. 고아원의 딱한 아이들을 위해 기부한 돈이 포악한 원장의 고급 승용차와 술값에 탕진된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게 뻔하다. 주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타박만 하기보다는 받는 쪽 자세는 제대로인지 꼼꼼히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