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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 뒤에 숨은 흑색선전 무방비 … 보완 장치 서둘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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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헌법재판소는 23일 인터넷 본인확인제(실명제)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악성 댓글 등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2007년 도입된 인터넷 실명제가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5년 만에 폐지됐다. 이날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이 서울 종로구 북촌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헌법재판소가 ‘인터넷 실명제(제한적 본인확인제)’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권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헌재는 이날 “인터넷 실명제가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위축시키고 주민번호가 없는 외국인의 인터넷 게시판 이용을 어렵게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이익이 공익보다 작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민주통합당 신경민 의원은 “인터넷 실명제는 세계적으로 우리만 시행했던 것”이라며 “부작용은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이버 세계에서 감내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둘째는 이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실효성이 작다는 것이다. 헌재는 “인터넷 실명제를 시행한 이후에도 불법 게시물이 의미 있게 감소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 실명제를 하지 않아도 문제 있는 글을 올릴 경우 아이디와 인터넷주소(IP어드레스) 등을 통해 글을 올린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마지막으로 국내 사업자에 대한 역차별 문제를 지적했다. 국내 인터넷 이용자들이 실명제 의무가 없는 해외 웹사이트로 도피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구글이 운영하는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의 경우 실명제가 시작되자 한국 사이트를 폐쇄했다. 청와대도 국가 설정을 ‘대한민국’이 아닌 ‘전 세계’로 바꿔 이명박 대통령의 홍보 동영상을 올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명제에 대한 위헌 결정에 대해 국내 포털사이트는 즉각 환영의 뜻을 표했다. 네이버·다음·구글 등 주요 포털 업체들로 구성된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규제가 폐지돼 다행”이라고 밝혔다. 최성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사무국장은 “인터넷 실명제는 온라인 생태계를 왜곡시켰던 대표적인 갈라파고스 규제”라고 밝혔다. 실명제 폐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익명의 그늘에 숨어 악의적인 댓글을 다는 일이 더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명재진 충남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실명제 폐지로 올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 등에 대한 허위사실 공표나 비방이 많아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네이버 관계자는 “실명제 위헌 결정이 악플이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글까지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실명제가 없더라도 누구라도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이용환경을 만들어 나가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상습적으로 악플이나 잘못된 글을 올리는 이용자에게 벌점을 부과해 한도를 넘기면 글 쓰는 기능을 차단하거나, 논란이 되는 글에는 앞머리에 반론을 넣도록 하는 등의 대안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게시판에 글을 쓸 때 본인 확인 의무가 사라졌을 뿐 선거법(공직선거법상 선거기간 중에는 게시판 이용자 실명 확인을 받고 있음)이나 청소년보호법·게임법(미성년자는 자정 이후 게임을 할 수 없음) 등에서는 의무적으로 본인 여부 혹은 연령 확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자들의 입장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앞으로는 실명제 대신 이 같은 피해구제 절차를 신속하고 편리하게 처리할 실질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온 글로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당했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포털을 비롯한 인터넷 사업자는 해당 글을 보이지 않게 ‘블라인드’ 처리를 한다. 하지만 글을 올린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면 다시 보여주고 그 이후에는 당사자 간에 소송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실명제 도입에 앞장섰던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날 “헌재 결정의 내용과 취지를 바탕으로 명예훼손 분쟁 처리 기능을 강화하고 사업자 자율규제 활성화 등 보완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박용진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허위사실 유포나 명예훼손에 대한 우려가 있기 때문에 시급히 국회가 현행 정보통신망법의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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