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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묻지마 칼부림’은 사회적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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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울 미아동에서, 의정부 전철역에서, 수원 술집에서, 그리고 그제는 서울 여의도에서 ‘묻지마 칼부림’이 일어났다. 곳곳에서 충격적 사건들이 동시다발로 벌어지자 시민들은 “바깥으로 나가기가 무섭다”며 불안해하고 있다.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전형적인 ‘자포자기형 분노 범죄’라는 점이다.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칼을 휘두른 범인들은 “누구라도 죽이고 싶었다”며 온 사회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일자리에서 소외되거나 가족 해체에 시달리는 사회적 외톨이가 대부분이었다.

 나쁜 버릇은 전염되기 쉽다고 했던가. 이웃 일본도 한발 앞서 비슷한 열병을 앓았다. 2008년을 전후해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늘고, 도리마(通り魔:길거리 악마)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20대 비정규직 해고자가 도쿄의 아키하바라(秋葉原)를 휘저으며 무고한 행인 8명을 살해했다. 이바라키(茨城)현에선 범인이 시내버스에 들어가 통학생 11명에게 칼을 휘둘렀다. 오사카(大阪) 도심에서도 30대 남성이 아무 이유 없이 처음 마주친 행인 2명을 죽였다. 일본은 10여 년간 74건의 도리마 사건에 시달렸다.

 일본은 이런 비극의 근본 원인을 ‘잃어버린 10년’의 거품 붕괴 후유증에다 사회 양극화에서 찾았다. 여기에 비정규직 대량 해고가 겹치면서 분노와 박탈감에 휩싸인 사회적 외톨이들이 사소한 자극에도 감정 조절을 못해 일어난 사건이라 진단했다. 지금 우리 사회도 비슷한 처지나 다름없다. 국민의 98%가 “앞으로 계층 상승은 어렵다”며 좌절하고 있다.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이 늘면서 사회 양극화의 명암은 짙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도 더 이상 묻지마 칼부림을 ‘개인 범죄’로 돌릴 게 아니라 사회적 문제, 사회적 질병으로 인식해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차제에 일본의 종합적인 처방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 법원은 같은 유형의 범죄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리마 범인에 대해 신속하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동시에 히키코모리에 대한 상담과 훈련, 우범자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일본 정부와 정치권은 비정규직 대책을 마련하는 등 ‘격차 사회(사회 양극화)’를 치유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학교·가족을 포함해 일본 사회 전체가 공동체(커뮤니티) 회복에 팔을 걷어붙이면서 급증하던 도리마 사건이 한풀 꺾이고 있다.

 우리도 전방위적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법무부와 경찰이 전자 발찌 정보를 공유하거나 경비인력만 늘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전문 지원센터의 상담과 취업훈련을 통해 사회적 외톨이들을 정상 궤도로 복귀시켜야 한다. 사회 안전망과 복지망을 손질해 양극화와 가계 빈곤에 대처해야 한다. 이른바 루저(사회적 패배자)들의 상실감을 증폭시키는 인터넷의 부작용을 차단하고, 학교의 인성교육과 공동체 정신 강화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묻지마 칼부림의 범인은 사전에 고통을 호소하거나 범죄를 예고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인터넷 카페에 ‘나는 정신적 살인마가 되어 가고 있다’ ‘훨씬 강렬한 사건을 저지르고 싶다’는 글을 올리는 사회적 외톨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 공동체가 과연 건강한지를 자문해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