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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장보고를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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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올해는 간지(干支)로 따져 임진(壬辰)년이다. 한데 올여름 중국 극장가엔 ‘갑오(甲午)’ 두 글자를 딴 영화가 걸렸다. 지난달 6일 개봉한 ‘1894·갑오대해전’이 그것이다. 갑오해전은 청일전쟁 기간 벌어진 두 해전 중 하나다. 첫 번째가 풍도(豊島)해전이다. 갑오년인 1894년 7월 25일 일본은 우리나라 서해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정을 기습 공격해 청일전쟁의 막을 올렸다.

 두 번째가 영화의 소재인 갑오해전이다. 압록강 하구에서 멀지 않은 서해(西海)에서 청의 북양(北洋)함대 12척과 일본 연합함대 12척이 맞붙었다. 청 함정은 5척이 격침됐지만 일본은 5척이 손상을 입었을 뿐이다. 갑오년 9월 17일의 일이었다. 청은 패했지만 등세창(鄧世昌)이란 비운의 영웅을 낳았다. 포탄이 바닥나자 자신의 함정을 적선과 충돌시켜 적과 함께 죽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갑오해전 이후 북양함대는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 앞바다의 류궁다오(劉公島)로 피신한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이곳까지 쫓아온 일본 육·해군의 협공을 받고 궤멸됨으로써 청일전쟁은 막을 내린다. 이후 청·일 간 체결된 강화조약의 1조는 ‘중국은 조선이 완전무결의 자주독립 국가임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정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이케 하기 위한 조치였다. 우리로선 기가 막히고 한탄스럽지만 100여 년 전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달 초 류궁다오를 찾았다. 웨이하이 부두에서 배를 타니 20분 만에 닿을 정도로 가깝다. 당시 아시아 최강이라던 북양함대는 어떻게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전멸의 길을 걸었을까. 류궁다오 내 갑오전쟁박물관과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丁汝昌)의 거처 등 곳곳에 산재한 유적은 패전의 상처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역사적 아픔을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북양함대는 이홍장(李鴻章)의 지휘 아래 1888년 건설됐다. 청일전쟁 직전엔 철갑선을 포함해 29척의 함정을 보유했다. 아시아 최강, 세계 4위란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갑오해전이 터지자 곪았던 상처가 드러났다. 정여창이 탄 정원(定遠)함은 개전 초기부터 화염에 휩싸였다. 포탑에 불이 나 정여창이 화상을 입고, 깃발이 타면서 지휘체계에 타격을 입었다. 7년 동안 수리 한 번 하지 않은 결과였다. 치원(致遠)함을 지휘하던 등세창은 포탄이 바닥나 전사하고 말았다.

 정원함은 왜 수리를 못했고, 치원함은 왜 포탄이 떨어졌을까.

 이에 대한 설명을 우리는 청의 여름 별궁인 베이징의 이화원에 갔을 때 들은 기억이 있다. 당시 청의 실세이던 서태후(西太后)가 북양함대의 자금을 빼돌려 자신이 거처로 쓰던 이화원을 꾸미는 데 쓴 것이다. 특히 갑오년에 60세를 맞는 서태후의 생일 축하연 준비를 위해 북양함대는 1891년부터 포탄 구입이 전면 불허된 터였다. 반면 일본은 왕실 경비를 줄여 함정의 구입 자금을 마련했다. 청일전쟁은 이미 준비 단계에서 승패가 갈렸던 것이다.

 현재 중요한 건 중국이 패전의 현장인 류궁다오 곳곳에 기념관을 건설하고, 또 관련 영화를 만드는 이유다. 100여 년 전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각오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갑오전쟁박물관을 ‘전국 청소년 교육기지’로 지정했다. 애국주의 고취가 목표다. 영화 ‘갑오해전’이 전하는 메시지 또한 명료하다. 해군력 강화다. 사실 중국은 해양국가는 아니다. 한자를 봐도 바다 물고기 이름이 많지 않다. 그만큼 바다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제 대양해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군력 강화 없이는 강대국 부상도 없다는 판단에서다. 빠르면 오는 9월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투입된다. 7월 말로 이미 아홉 차례의 시험 항해를 마쳤다. 일본의 움직임도 부산하다. 최근 발간한 방위백서를 통해 ‘중국 해군의 태평양 진출 상시화’ 운운하며 재무장의 빌미를 찾고 있다. 19세기 말 조선의 패권을 놓고 조선의 땅과 바다에서 다퉜던 중·일이 다시 해군력 강화 경쟁을 벌일 태세다.

 동아시아 해역의 파고 또한 높아지고 있다. 독도와 센카쿠(중국명·댜오위다오·釣魚島)열도의 영유권을 놓고 한·일 간, 또 중·일 간 민족 감정이 악화일로에 있다. 이 같은 긴장의 시기에 우리가 할 일은 무언가. 해답의 실마리 또한 웨이하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웨이하이 스다오(石島)엔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절 법화원(法華院)이 있다. 아울러 그의 업적을 기린 기념탑과 기념관 등이 세워져 있다.

 장보고의 가장 큰 공은 해적을 소탕하고 한·중·일 3국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를 건설한 점이다. 그의 강력한 수군(水軍) 아래 서해는 평화를 찾고, 해상 무역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아시아 해역을 3국 평화의 바다로 만들기 위해선 장보고에 비견될 우리의 새로운 노력이 요구된다. 적어도 우리 근해에서 우리의 운명을 놓고 제3의 국가들이 싸움을 벌이는 한탄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21세기의 장보고를 양성해야 한다.

 그게 올해로 중·일 수교 40년, 또 오는 24일로 한·중 수교 20년을 맞는 한·중·일 3국의 상생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산둥성 웨이하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