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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러 저격수의 실화 '에너미 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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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감독 장 자크 아노가 1997년 '티벳에서의 7년' 이후 4년 만에 들고 나온, 스케일이 큰 영화다.

지금까지 그가 내놓은 영화들은 매번 묘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원시 인류의 삶을 상상한 '불을 찾아서' , 이야기가 워낙 복잡해 영화화가 불가능하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장미의 이름' , 10대 소녀의 파격적인 노출로 화제를 일으킨 '연인' 등이 그랬다.

이 작품들은 아노 감독에게 수작 여부를 떠나 신선한 소재를 집어낼 줄 안다는 평가를 안겼다. 하지만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원제 Enemy at the Gates) 에선 감독의 재기가 번득이지는 않는다. 외형상 규모를 갖추긴 했지만 관객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만한 '무기' 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 개막작이란 '프리미엄' 을 지닌 이 작품은 2차대전 당시 러시아(구 소련) 군과 독일군의 전투가 치열했던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러시아의 전설적인 저격수 바실리 자이스테프의 활약상을 그렸다.

1942년에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 대전사에서 결정적인 전투의 하나로 기록돼 있다.

독일군의 파상공세로 러시아군의 위기가 깊어갈 무렵 러시아 장교 다닐로프(조셉 파인즈) 는 바실리(쥬드 로) 의 기막힌 사격 솜씨를 목격한다. 다닐로프에 의해 바실리는 나치 장교들을 처단하는 저격수로 변모하고 러시아 국민의 전설적 영웅이 된다.

마침내 독일측에서도 바실리를 없애기 위해 최고의 저격수 코니그(에드 해리스) 소령을 파견한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전장에서 꽃피는 사랑이 상투적이고 결말이 예견되는 저격수의 두뇌 싸움이 늘어지면서 그다지 조바심을 유발하지 못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의 오프닝을 상기시키는 초반부 러시아.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장면은 스케일이 크고 사실적이나 영화는 그런 흥분은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전쟁터란 중압감을 주는 배경에다 저격수들의 대결이 속도감 없이 이어지는 영화는 두 시간이 넘게 지속되며 '길다' 는 인상을 갖게 한다.

하지만 독일 저격수 역을 맡은 에드 해리스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 '폴락' 으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랐던 그는 지적인 품위가 우러나면서도 사람 잡는 사냥꾼의 냉혹한 표정으로 좌중을 압도한다.

다중 인격자의 면모를 표현할 줄 아는 그는 말 없이 서 있는 것 자체가 연기인 배우다. '리플리' 에서 플레이보이 디키 역을 맡으며 급부상하는 쥬드 로, '셰익스피어 인 러브' 에서 셰익스피어로 분해 호연했던 조셉 파인즈, 두 배우는 훤칠한 외모로 시선을 잡을 만하지만 전쟁터의 절실한 분위기를 전달하는 경지엔 이르지 못한다.

'타이타닉' 의 음악을 맡은 제임스 호너가 86년 '장미의 이름' 이후 다시 아노감독과 손을 잡았다. 걸프전을 무대로 한 '커리지 언더 파이어' ,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영광의 깃발' 등에서 전장 음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호너는 이번에도 성숙미와 비장함이 담긴 음악을 선사한다. 19일 개봉.

영웅담에 애뜻한 사랑까지 담아낸 전쟁영화다. 그런데 그 흐름이 영화 속의 나치군 탱크마냥 둔중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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