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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교사 94% “수리논술, 학교 수업으론 대비 못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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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울 강북의 A고에서 10여 년째 수학을 가르쳐온 김모 교사는 이달 초 고3 학생이 내민 문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산확률 분포 유형 중 하나인 푸아송(Poisson) 분포와 관련된 문제로 고교 교육 범위 밖이었다. 김 교사도 대학(수학교육과) 3~4학년 때 배웠던 내용이다. 지난해 서강대 수리논술 문제였다. 김 교사는 “대학 교재를 들춰 보고서야 학생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며 “이러니 학생도 교사도 ‘명문대 가려면 대학 수학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수리논술 문제는 수학교사들도 어려워한다. 본지와 함께 분석에 참여한 한 교사는 서울대의 지난해 수리논술 문제에서 애를 먹었다. 이 교사는 제한시간(5시간) 안에 전체 4개 문항을 다 풀지 못했다. 대학 1학년이 배우는 해석학의 ‘특이적분’ 문제에서 시간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이다. 이 교사는 “고교에서 배우는 적분과 극한을 응용해 문제를 풀면 도저히 제한시간 안에 문제를 풀 수 없다”며 “이런 문제를 내는 것은 대학이 선행학습을 부추기는 격”이라고 한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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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 수준을 뛰어넘는 대입 수시논술을 공교육만으로 대비할 수 있을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7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수학교육대회 연수에 참여한 고교 수학교사 162명에게 설문한 결과 94%(152명)가 “학교 수업만으로는 대입 수리논술을 대비할 수 없다”고 답했다. 교사 절반 가까이(44%·71명)가 “우리 학교에 수리논술에 대비할 수업이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B고 이모 교사는 “수능을 위한 정규 수업, 생활지도와 진학 상담도 소홀할 수 없는데 논술을 위해 별도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과학고 등을 제외한 대부분 학교에선 정규 수업에서 수리논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일부 학교가 희망자들을 모아 주 2~3시간의 방과후 수업을 운영하지만 제대로 하기는 어렵다. 논술 방과후 학습을 지도 중인 경기도의 최모 교사는 “기출 문제를 보면 내신 1~2등급 학생 20명 중 한두 명만 손을 댈 만큼 어려운 문제가 다수”라며 “최상위권 대학 문제는 한 개 설명하는 데 수업시간(50분)을 넘길 정도”라고 전했다.

 교육계 안팎에선 대학 수준의 수리논술이 특정 고교에 유리하고 사교육을 부추긴다고 우려한다. ‘특목고 대 일반고’ ‘강남 대 비강남’의 명문대 합격률을 벌어지게 하는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서울 강북 C고의 교사는 “단순히 어려워서가 아니라 선행학습을 한 학생에게 유리하다는 점에서 수리논술의 폐해가 심각하다”며 “고교 교육과정을 무시하는 대학의 출제 관행이 고교생을 학원으로 내몰고 있다”고 걱정했다.

 수리논술이 애초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2000년대 초 도입 당시엔 수학사적으로 중요한 내용, 실생활에 접목된 소재, 기본 원리를 응용한 문제가 주류였다. 2006년도 이화여대 논술은 남녀 임금 격차에 대한 신문 기사와 통계를 준 뒤 수험생이 자신의 견해를 논하도록 했다. 2008년도 입시에서 연세대는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와 수학적 개념을 결합시킨 문제를 출제했다. 이런 배경에는 대학의 자율을 해친다는 이유로 2008년 2월 폐지된 ‘논술 가이드라인’의 효과도 일부 있었다.

 가이드라인 폐지 당시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국·영·수 중심의 지필고사가 되지 않을 것” “대학 양심을 믿어 달라”(손병두 당시 회장)고 밝혔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제를 풀어 정답을 구하는 본고사형으로 바뀌었다.

◆특별취재팀=성시윤(팀장)·천인성·윤석만·이한길·이유정 기자, 박소현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논술 가이드라인=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가 만든 논술 출제 기준. 일부 대학에서 논술을 본고사처럼 출제한다는 논란이 일자 제정됐다. 기준은 ①외국어 제시문 ②단답형이나 객관식 문제 ③특정 교과의 암기된 지식을 묻는 문제 ④수학이나 과학 문제 중 풀이 과정이나 정답을 요구하는 문제는 모두 본고사형으로 분류해 금지했다. 대학들의 자율성이 강조되면서 2009학년도 대입부터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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