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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시다 … 시어의 바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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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근화 시인은 말하는 것이 읽고 쓰는 것 보다 익숙하지 않아 인터뷰가 늘 어렵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읽는 것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하다간 똥구멍 찢어진다’는 꾸지람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김성룡 기자]

“수년 전 봄이었어요. 혈압 때문에 고생하던 엄마가 쓰러지신거죠. 한 달 간 입원을 했는데 그 때 병간호를 제가 했어요. ‘차가운 잠’을 떠올린 건 그 때였어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근화(36) 시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뜻 눈가에 눈물이 고였던 것도 같다. 그는 그 해 봄, 병원 창 밖으로 흐드러진 벚꽃을 보았다. 대학 캠퍼스가 면한 병원이었다. 학생들은 만개한 벚꽃 아래 모여 사진을 찍었다. “등 뒤에는 병과 죽음이 있고, 제 앞에는 삶의 충만함이 있었어요. ‘나는 경계에 서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시인은 어느 공상 과학소설에서 본 냉동수면을 생각했다. 엄마와 함께 냉동수면에 들어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개발되었을 때 다시 깨어나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했다. 사연을 듣고 나니 ‘이백년 후의 차가운 잠에서 깨어나 다시 만난다면/우리는 다정한 연인이 되어/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케이크를 푹푹 떠먹을까’ 라고 썼던 그의 시구가 아프게 박혔다.

 지난 5월 출간한 세 번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차가운 잠’에 대해 시인은 “엄마 이야기라 애정이 있어 표제작으로 꼽았지만 대표작은 아니다”라고 했다. 웬만해선 시에 개인사를 집어넣거나 감정을 누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픈 사건을 밝 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조재룡 예심위원은 “일상 속에서 소재를 취하지만 보여주는 방식이 관습적이거나 넋두리가 아니라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고 평하기도 했다.

 시인에게 “왜 속을 드러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 본래 감정표현을 잘 안하는 편이다. 성격도 차갑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하지만 꼭 감정을 폭발하는 것이 시를 쓰는 방법은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저는 온몸을 태워가면서 글을 쓰지 않아요. 집에서 책 읽고 글 쓰고, 일주일에 하루 정도 대학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는 일이 소중하고 행복해요. 시가 안써져서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니까요.”

 내년이면 등단 10년이 되는 시인에게 일상은 여전히 무궁무진한 시어의 바다다. 콩나물을 우적우적 씹고 있는 딸 아이의 재밌는 얼굴(‘코미디’), 화장실에 핀 곰팡이(‘곰팡이 외롭지 않은 이야기’), 입속에 가득 고인 치약 거품(‘푸른 바다 향기 치약’) 에서도 시가 돋아난다. 이런 세밀한 관찰력과 감수성은 동년배 젊은 시인과 차별화되는 그의 강점이다.

 “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삶을 더 외롭게 꾸려가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칭찬이나 비판은 다음 글을 쓸 때 간섭이 되기 마련이거든요. 더 꼿꼿하게 제 개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임무인 것 같아요.”

<차가운 잠>

이근화

꿈속에서 세차게 따귀를 얻어맞았다
새벽이 통째로 흔들렸고
흔들린 새벽의 공기를 되돌려 놓기 위해
전화벨이 울렸다

나의 눈은 동그란 벽시계에
나의 눈은 병상의 엄마에게
긴 복도를 따라 걷지만
복도와 두 눈을 맞출 수는 없다

일주일 사이 꽃이 졌다
여기저기 팡팡 사진이 터지고
맘껏 담배 연기를 품었는데
나는 왜 빠져나가지 않나

고장 난 시계를 어떻게 할까
혈관을 따라 울리는 피의 음악을 또 어떻게 할까

오래 전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살비듬 같은 것을
내가 옷처럼 편안하게 입고 있는데
거울 속에는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있고

할머니도 아줌마도 아이도 아닌
엄마가 희미하게 손을 뻗는다

이백년 후의 차가운 잠에서 깨어나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다정한 연인이 되어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케이크를 푹푹 떠먹을까

환멸과 동정의 젖꼭지를 물고 거침없이
이 세계를 생산할 수 있다면
차가운 잠에서 깨어나

김효은 기자

◆이근화=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윤동주문학상, 김준성문학상 등 수상.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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