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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후진국형 안전불감증 사고, 이젠 고리 끊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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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 한복판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공사현장에서 13일 발생한 화재는 인재(人災)의 종합판이다. 4명이 목숨을 잃고 25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문화재로 가득한 경복궁 바로 옆, 청와대·정부 중앙청사의 코앞, 국내외 관광객으로 붐비는 북촌 초입에서 벌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번 화재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봐도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이 부른 참사다. 몇 년을 주기로 반복돼 온 후진국형 참사와 닮은꼴이다. 우레탄 공사를 하던 밀폐공간에서 불이 나면서 발생한 유독가스 때문에 사람들이 제대로 대피하지 못하고 화를 당한 경우다.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2008년 1월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 화재, 57명이 희생된 1999년 인천시 인현동 호프집 화재, 27명이 숨진 98년 10월 부산시 범창콜드프라자 화재와 흡사하다. 사고가 나면 부랴부랴 미봉책을 내놓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 안전불감증이 도지는 바람에 참사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유사 사고가 반복해 발생하고 있다.

 일부에선 공사현장에서 공기 단축을 위해 안전공정 관리지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바람에 화재가 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미술관과 시행사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수사 당국은 이 부분을 집중 수사해 책임소재를 분명히 가려내야 한다. 해당 공사장의 안전규정 준수를 감독하는 노동당국은 현장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철저히 살펴야 마땅하다. 생명·안전과 직결되는 이런 문제점을 사전에 제대로 살피지 못한 당국의 감독 책임도 철저히 따져야 한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무리한 공사 일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미술관 측은 전체면적 3만5000㎡인 서울관의 완공 시기를 내년 2월로 맞추고 건립 기간을 20개월로 잡았다. 이에 서울 종로구의 공공프로젝트를 심의하는 도시공간예술위원회 위원장인 건축가 승효상씨는 4년은 필요하다고 지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 설계자인 민현준 홍익대 건축과 교수도 무리한 공기를 지적하면서 연장을 주장했지만 무시됐다고 한다. 문화부는 이렇게 무리하게 공사 일정을 잡은 이유를 국민 앞에 분명히 밝혀야 한다.

 불이 난 미술관은 서울 한복판 문화 랜드마크의 하나로서 두고두고 한국의 이미지로 기억될 건축물이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그 공사 과정 자체도 하나의 역사다. 이런 공사일수록 철저하게 진행해 뒤탈이 없도록 하는 게 당연하다. 외국에선 4년이나 걸리는 것을 한국에선 20개월에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자랑거리라고 생각했다면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불도저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제 무리한 공사는 미덕이 아니고 졸속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충분한 검토, 제대로 된 공사, 안전한 작업을 존중하는 선진국형 건축·건설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국민의 관심사는 미술관 개관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희생을 낳는 후진국형 재해의 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