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오리올스 역사 (2) - 얼 위버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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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브레이브스가 보스턴을 떠나면서 빅리그에는 프랜차이즈 이동의 바람이 불었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도 1954년 볼티모어로 옮겨와 오리올스로 이름을 바꿨다.

오리올스는 폴 리차드스 체제로 새롭게 시작했다. 리차드스는 오리올스의 단장 겸 감독으로 재직하며 훗날 회장 겸 단장에 취임할 리 맥파일과 함께 팀재건의 초석을 닦았다.

1954년 100패(54승)를 당했던 오리올스는 3년만에 5할승률에 올랐다.

행크 바우어가 지회봉을 잡게 되는 1964년부터 오리올스는 20년간의 전성기에 들어간다. 이후 1983년까지 오리올스는 7번의 지구 우승 · 6번의 리그 우승 ·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내며 뉴욕 양키스의 독주를 끝냈다.

1964년과 65년을 각각 2위와 3위에 머물렀던 오리올스가 최고의 전력을 완성한 것은 1966년이다.

1959년 카디널스와의 동전던지기 끝에 1루수 부그 파월을 확보한 오리올스는 1965년 겨울에는 무려 4명의 선수를 내주는 대가로 신시내티 레즈로부터 프랭크 로빈슨을 데려오면서, 파월-프랭크 로빈슨-브룩스 로빈슨으로 이어지는 막강 클린업을 구축했다.

1962년 팜 디렉터였던 짐 맥라플린은 목이 날아갈 것을 각오하고 단장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8만달러의 거금으로 투수 데이브 맥널리를 잡았다. 실제로 맥라플린은 그 사건 때문에 해임됐지만, 맥널리는 68년부터 4년연속 20승을 거두며 오리올스에게 181승을 선사했다.

오리올스가 낳은 '최고의 투수' 짐 파머의 영입도 인상적이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절 팻 길릭(현 시애틀 매리너스 단장)이 션 그린(현 LA 다저스)의 집에 처들어간 것처럼 리차드스 역시 파머의 집을 방문, 4만달러에 오리올스의 유니폼을 입혔다. 파머와 맥널리는 1969년에 합류할 마이크 큘러와 함께 5년연속 팀방어율 1위의 막강 투수진을 이끌었다.

3루수 브룩스 로빈슨을 중심으로 데이비 존슨(2루수) · 마크 벌랜저(유격수)로 이어졌던 내야진은 도합 27개의 골드글러브를 따냈을 정도로 튼튼했다. 당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이었던 메이요 스미스는 "오리올스의 내야로 공을 날리는 것은 벽에다 햄버거를 던지는 꼴이다"라며 불만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오리올스는 1966년 허먼 킬러브루가 버티고 있던 미네소타 트윈스를 9경기차로 꺾고 볼티모어에서의 첫번째이자 세인트루이스 시절까지 포함하면 통산 두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프랭크 로빈슨과 파월은 나란히 100타점을 넘겼고, 2년차투수 파머는 팀내최다승인 15승을 올렸다.

오리올스는 LA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를 4경기만에 끝내며 감격적인 첫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파머는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완봉승을 따냈다.

그러나 오리올스는 파머가 어깨부상으로 1967시즌 내내 결장하면서 성공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6위로 추락한 오리올스는 이듬해 맥널리와 짐 하딘의 활약으로 다시 2위에 올랐지만, 파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1969시즌을 앞두고 파머가 돌아왔다. 파머는 그동안 트레이드마크였던 삼진 위주의 피칭을 버리고, 높은 직구로 플라이볼을 유도하는 피칭으로 부상 이전보다 더 강력한 투수로 변모했다. 통산 8번의 20승시즌, 사이영상 3회에 빛나는 파머는 1984년을 끝으로 영원한 오리올스맨으로 남았다.

파머의 복귀로 천군만마를 얻은 오리올스는 무려 .673(109승 53패)라는 승률을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도입된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서부지구 챔피언 미네소타 트윈스를 KO시켰다.

뉴욕 메츠와의 월드시리즈는 당연히 오리올스의 우승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리올스는 '어메이징' 메츠에게 월드시리즈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톰 시버 · 제리 쿠스먼 · 놀란 라이언 등이 버틴 메츠의 마운드를 공략하지 못한 타선의 책임이 컸다.

1970년 오리올스는 108승으로 다시 아메리칸리그를 평정한 다음 월드시리즈에서는 내셔널리그 챔피언인 신시내티 레즈에게 확실히 앙갚음을 했다. 21타수 9안타(2홈런) 타율 .429 · 6타점의 맹타를 휘두른 브룩스 로빈슨은 월드시리즈 MVP에 올랐다.

1971년 오리올스는 5명의 선발투수 중 무려 4명(파머 · 큘러 · 맥널리 · 팻 돕슨)이 20승 이상을 거두는 빼어난 투수력으로 다시 동부지구의 우승자가 됐다. 오리올스는 리그 챔피언십에서 신흥강호로 부상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를 간단히 KO시키며 리그 챔피언십이 도입된 이후 세번의 우승을 모두 전승으로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는 1969년의 복사판이었다. 당연히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꺾을 줄 알았던 오리올스는 7차전 끝에 무릎을 꿇었다. 파이어리츠의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7차전의 결정적인 솔로홈런으로 오리올스의 연속우승을 좌절시켰다.

1972년 3위로 주춤했던 오리올스는 73년과 74년 다시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리그 챔피언십에서 어슬레틱스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75 · 76 · 77년 3년연속 지구 2위에 머물렀던 오리올스는 1979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에 복귀했다. 그러나 오리올스는 이번에는 윌리 스타겔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맞아 또 다시 파이어리츠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헌납했다.

1982년 지구 2위를 끝으로 위버 감독이 해임되면서 오리올스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얼 위버 시대'도 14년만에 막을 내렸다.

위버 시대의 오리올스는 파이어리츠 못지 않은 끈끈한 팀워크의 팀이었다.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부분의 선수는 위버 감독 밑에서 마이너리그부터 동고동락을 같이 했다.

"25명, 아니 마이너리거 모두 내 소중한 선수들이다. 나는 우승을 떠나 그들과 같이 야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라는 위버 감독의 말은 당시 오리올스의 분위기를 잘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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