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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61)

중앙일보

입력

1년만에 다시 미국으로 날아간 우리는 1년 전과 같은 코스를 돌며 로드쇼를 했다. 5共 태동기였다. 1년 전 멤버 세 사람 중 남덕우(南悳祐) 전 대통령경제특보만 빠져 있었다.

이에 앞서 이승윤(李承潤) 당시 재무장관은 전두환(全斗煥)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미국과 일본에 갈 특사로 남 전 특보와 고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을 추천했다.

하루는 이장관이 국제금융차관보로 있던 내게 "미국엔 누가 가는 게 좋겠느냐" 고 물었다. 나는 "지속성을 띨 수 있고 미국쪽에서 신임도 두터운 남 전 특보가 1년 전 멤버들과 함께 가게 하자" 고 말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 라며 전위원장의 측근이었던 허화평(許和平) 보안사 비서실장(전 의원)과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다.

남 전 특보를 보내기로 결정이 나자 이장관은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장관은 "아무런 염려 말라" 며 "전 위원장이 꼭 좀 도와 달라고 한다" 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남 전 특보가 합류하게 됐다.

그런데 막상 출발할 때가 되자 남 전 특보가 "난 이번에 못 갈 것 같애" 하는 것이 아닌가□ 출국할 때에야 비로소 로드쇼를 재개하기 위해 귀국한 그를 신군부가 5공 초대 총리로 내정한 사실을 알게 됐다.

다시 밟은 미국 땅. 한국 경제는 여전히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5공 출범 후 다시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가 나는 현지에서 재무차관 발령을 받았다. 뉴욕 파크레인 호텔에 묵고 있을 때였다. 새벽 서너시 쯤 됐을까, 곤히 자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재무부 총무과장이었다.

"축하 드립니다. 차관 발령 받으셨습니다. "

1980년 9월 내 나이 마흔여섯, 재무부에 들어간 지 21년만이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가슴이 설레어 잠이 오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커튼 밖으로 날이 훤하게 밝아 왔다.

문득 '앞으로 옷 벗을 날이 멀지 않았다' 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차관 자리는 직업 공무원으로서 최고의 영예였다. 수명은 기껏해야 1~2년. 명예롭게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나의 언행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직언을 했다.

당시 나는 세 가지 결심을 했다. '공직생활을 명예롭게 마무리하겠다. 공무원을 그만두면 1백80도 방향 전환을 하겠다. 곧바로 민간기업으로 가지는 않겠다. '

59년 재무부 임시서기로 출발해 11년만에 국장급인 주영대사관 재무관을 지낸 나는 그 이듬해 차관을 끝으로 재무부를 떠났다. 이미 밝힌 대로 그 후 외환은행장.은행감독원장을 거쳐 만 5년만에 재무부의 수장으로 복귀했다. 만일 내가 재무부 본부에서만 컸다면 국장 정도 하고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연어가 고향을 떠나듯이 해외 근무도 하고 팔자에 없는 은행장 노릇도 했기 때문에 입각까지 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70년 가을 런던 재무관으로 나갈 당시 재무장관은 남덕우 전 총리였다.

그에 앞서 나는 같은 해 서울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총회 준비를 떠맡았었다. 내가 사무관 때 스카웃한 홍재형(洪在馨) 현 민주당 의원과 함께 우리는 꼬박 1년 동안 회의 준비에 매달렸다.

당시 ADB 총회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유치한 가장 큰 회의였다. 그 무렵 신축한 조선호텔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호텔 짓는 것을 돕기도 했다. 막판엔 홍의원이 현장에 나가 살다시피했다.

ADB 총회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남장관은 나를 런던 재무관으로, 홍의원을 재무관보로 승진 발령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eyewhysy@nownuri.net>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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