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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자원 뺏으려 꾸민 일”… 언어학자까지 음모론 주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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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10면

그리스 아테네의 한 1유로 숍. 우리나라의 1000원 숍 같은 이런 할인점이 그리스 각지에서 성업 중이다. 대량실업 등으로 구매력이 떨어진 소비자들이 많이 몰린다. [블룸버그 뉴스]

“이 위기가 그리스만의 것은 아닙니다.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 심지어 (비교적 낫다는) 네덜란드까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프랑스도 썩 좋은 편은 아니죠. 결국 독일과 덴마크를 제외한 유로존의 국가들은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죠. 유럽연합(EU)의 큰 틀 안에서만 지금의 위기를 풀 수 있어요.”

그리스학 교수, 경제난 그리스를 가다

이달 초 그리스 아테네에서 오랜만에 해후한 타시아 카크리지(70) 전 교수는 강변했다. 나와 1977년부터 83년까지 아테네 국립대학 철학대학에서 언어학을 함께 공부한 오랜 지기다. 그와의 대화는 언어학의 새 조류를 논하다가 인상 깊게 본 책이나 영화 이야기로 번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2년 동안 그리스를 괴롭혀 온 경제위기는 그를 경제학자로 만들어버렸다. 아니 이번 여행 기간 동안 그리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대화 주제는 경제로 귀결됐다. 칠순의 나이에도 문학소녀 같던 타시아마저 연금이 월 500유로나 깎였다며 푸념했다. 나는 ‘해외 길거리 강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리스를 돌고 있다. 7월 중순부터 한 달 남짓 그리스 문명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 30여 명을 이끌고 이 나라 도시·섬 등 20여 곳을 방문하는 여정이다. 참으로 낙천적이고 삶을 즐기는 일이 최우선이던 그리스인들, 하지만 이번 여정에서 접한 현지인들의 표정은 무척 어두워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쉽게 눈에 띄는 부동산 임대 광고.

‘경제학자’ 타시아의 비평은 계속됐다. “물론 근본적인 잘못은 우리나라에 있어요. 2001년 무리하게 유로존에 들어간 것부터 잘못이죠. 2004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그리스 전통 화폐 드라크마를 쓰는 ‘값싼’ 올림픽이 아니라 유로를 쓰는 ‘제값 받는’ 올림픽을 하자는 여론이 득세했어요.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맞는 말이다. 2001년 겨울에도 이번 같은 강좌를 이끌기 위해 그리스에 왔다. 당시 외국인 관광객에게 그리스는 자그마한 천국이었다. 서양 고대사가 시작된 신화의 땅, 수준 높은 고대 건축과 예술품이 도처에 널린 나라였다. 볼거리는 무궁무진하고 숙박·음식 등 물가는 쌌다. 사람들은 또 얼마나 순박하고 친절한가. 계산적이지 않고 솔직 담백한 응대, 조르바 같은 호쾌함은 마치 축제에 참석한 듯한 기분을 자아냈다.

그리스인들의 신명, 청명한 대기, 불타는 태양과 해변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짙푸른 에게해, 모든 게 신비롭고 평안했다. 스트레스를 풀면서 번잡한 일상생활로부터 일탈을 맛보고, 낯선 곳에서 자아를 되찾아 보려는 이들에게 그리스는 최상의 나라였다. 그렇다. 상품으로 치자면 가격 대비 만족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다.

허리 부러질 듯한 긴축정책
그리스는 유로화를 쓰게 된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우선 유로화에 대한 드라크마의 환율이 과대 평가됐다. 10드라크마를 주고 1유로를 받아야 맞는데 5드라크마만 주고 1유로를 받았다면 당장 두 배로 부자가 된다. 자연스레 물가가 오르고 씀씀이는 헤퍼진다. 임금도 따라 올라야 하니 인플레는 불 보듯 뻔하다. 그리스가 유로화를 쓰자 곧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내가 2003년 여름 한국연극제 공연단을 따라 그리스를 방문했을 때 피부물가가 불과 2년 만에 세배로 족히 올라 있었다. ‘가격 대비 만족도’를 기억하는 나는 ‘인플레의 횡포’가 어이없어 첫 끼니를 굶기까지 했다.

과대 평가된 드라크마 탓에 그리스의 수출은 큰 상처를 입었다. 가격 경쟁력이 현저하게 추락해 주력산업인 관광 분야가 무너졌다. 저렴한 관광 시대는 끝나고 지갑이 얇은 유럽의 청년들은 체코·헝가리 등지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스는 촌스럽고 천박한 벼락부자처럼 비쳐졌다. 젊은이들이 발길을 끊으면 활기가 떨어진다. 아무리 좋은 유적과 역사·문화를 지녀도 생동하는 축제가 없는 관광은 지루하다. 그리스 관광청은 “고급 관광상품을 대안으로 개발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허사였다.

이후 적자투성이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그 뒤 잠시 불었던 부동산 거품경기, 해외 차관으로 지탱한 호황,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거품 붕괴, 아이슬란드·아일랜드에 이은 그리스의 국가부도 위기, 유로존 붕괴의 공포 등등…. 다들 잘 아시는 고행길의 연속이다.

그리스 정부의 경제위기 대응책은 ‘허리띠 졸라매기’와 ‘세금 더 걷기’였다.

우선 수입이 유리지갑처럼 투명한 공무원과 교사, 공기업 직원, 연금 생활자의 봉급과 연금을 깎았다. 위기 발발 후 그리스 국민의 봉급과 연금은 거의 40% 가까이 깎였다. 전기공사와 전신회사를 다녀 두 가지 연금을 받는 내 친구 한 사람은 연금이 3100유로에서 700유로나 깎였다. 교사 출신인 또 다른 여성 친구는 1600유로에서 500유로가 깎였다. 구매력과 내수가 위축되니 우선 집세가 많이 떨어졌다. 부모로부터 독립해 살던 젊은이들은 다시 부모 집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스에 유학 중인 내 제자는 월세가 340유로에서 90유로로 내렸다고 한다. 그래도 입주 수요가 확 줄어 빈집이 많다. 이번 여행 기간에 둘러본 도시마다 텅 빈 사무실들이 전보다 눈에 많이 띄었다. 아테네의 중심가 신타그마 광장 근방에도 유리창이 깨진 채 흉물스럽게 방치된 건물이 여럿 눈에 띄었다.

아테네 거리 곳곳에 걸인도 늘었다. 자부심 강한 그리스인들이 동냥을 한다는 건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서민들의 생활고가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가늠케 한다.

그리스 정부의 또 다른 조치는 ‘재산세 올리기’다. 그리스가 탈세 왕국이란 건 널리 알려져 있다. 유럽위원회(EC)에 따르면 지하경제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쯤 된다. 사용자와 종업원이 짜고 급여 신고금액을 절반으로 줄여 세금을 덜 내는 관행, 집세보다 낮은 가격의 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해 절세하는 관행 등은 상식에 속한다. 부자 국민은 많은데 나라 금고엔 돈이 말랐다. 세금만 제대로 걷어도 경제위기에 대한 내성을 꽤 갖출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래서 정부가 들고 나온 대책이 재산세다.
 
“경제위기 아니라 경제전쟁”
“무기 아닌 돈으로 하는 전쟁이에요. 그리스의 에게해와 이오니아해(그리스·이탈리아 사이 바다)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많이 발견됐어요. 이 개발권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권을 빼앗기 위해 세계 자본 마피아가 그리스 경제를 무력화하는 겁니다. 화석에너지 시대 다음에는 태양에너지 시대가 올 텐데 그리스의 태양자원을 탐내는 세력이 음모를 꾸미는 거죠.”

이제 그리스의 원로 언어학자조차 ‘컨스피러시(Conspiracy·음모)’를 입에 달고 사는 듯하다. 국제 음모론이다.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 누구나 혹하는 강렬한 태양과 관광자원, 이 모두 엄연한 현실이기에 국제자본이 이를 빼앗으려 한다는 그럴듯한 음모론이 급속히 퍼진다.

올해 그리스 관광은 바닥이다. 대표적 유적지 델피 신전마저도 관광객이 없었다. 텅 빈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수많은 인파로 어깨를 서로 부딪히며 겨우 지나던 곳이었다. 대부분 호텔과 레스토랑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수십 명의 우리 일행뿐이라니. 일행이 묵은 호텔에도 우리 관광버스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차량이 거의 없었다. 작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올림피아에도 관광객이 없었다. 이 무렵이면 좌석이 없을 정도로 빽빽한 플라타너스 아래 카페에서도 여유롭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스 관광산업의 새로운 고민은 크루즈 관광이다. 한꺼번에 수천 명씩 하선해 유적지로 몰려들면 기념사진 촬영조차 힘들 정도다. 이들은 한번 죽 훑어보고는 이내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귀선한다. 그리스 땅에서 식사 한 끼는커녕 커피 한 잔 제대로 할 짬이 없다. 육지에 내려 쓴 돈은 입장료뿐이다. 관광 수익은 대부분 크루즈 회사로 들어가고 현지에는 쓰레기만 남는다.

이번 체류 기간 중 느낀 건 국민들이 상당히 지치고 화나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총선에서 무난한 ‘현상 유지’를 택했지만 나라를 망친 정치가들을 다시 뽑아 줘야 하는 건 무척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리스 경제위기의 원인과 해법 모두 명확하다. 인구 1000여만 명의 나라에 공무원과 공기업·공공기관 직원이 70만 명이라고들 하고 광의의 공조직 종사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한다. 과도한 공조직을 구조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공무원 지위는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정리해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고대 그리스를 침탈한 로마의 한 장군은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약탈해 가면 마을 사람들은 굶어 죽으라는 말이냐. 자비를 베풀라”는 마을 촌장의 애원에 “저 붉은 태양과 저 푸른 바다를 두고 가는데 무슨 불평이냐”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상당수 그리스인은 그 태양과 바다를 탐내는 적(敵)이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 같다. 혹독한 경제위기, 불신의 늪을 어찌 넘길 것인가.

케아섬에 갔다. 아테네에서 가장 가까운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해 아테네 부자들의 별장이 많다. 가는 길에 아테네 외곽 해안들을 지났다. 어느 해변이든 바닷물에 몸을 담근 시민들로 가득했다. 동행한 이로 카소타키(52)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한국외국어대에서 그리스 정부 파견교수로 강의하고 있어 친하게 지낸다.

“저게 바로 그리스 사람이야. 여름 휴가를 포기 못해. 돈 없으면 동네 해수욕장에 가면 그만이지. 그리스는 어딜 가나 아름답고 안락한 해안이 있어. 경제위기라면 안 쓰고 버티면 그만이야. 그리스 사람들은 4000년 동안 숱한 어려움과 위기를 이겨낸 민족이야. ”

그리스 전공자 입장에서 그저 턱없는 낙관론만으론 들리진 않았다. 칠흑같이 어둡지만 그리스는 제 길을 찾아갈 것만 같다. 조바심보다 느긋함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조르바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유재원(62) 서울대 언어학과를 나와 그리스 아테네 국립대에서 언어학 박사를 했다. 한국외국어대 언어인지학과와 그리스-발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리스 신화의 세계』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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