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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민주화 시위 발상지엔 캠퍼스 커플 속삭임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 중국과학기술대학은 의외로 농업대성이라고 하는 안후이(安徽)성 수도 허페이(合肥)에 있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에 앞서 86년 민주화 시위가 처음 일어난 곳이다. 분수대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이는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한 이 대학 은퇴 교수다. 2 ‘중국의 괴테’라 불리는 궈모뤄(郭沫若)의 동상. 그는 1958년 중국과학원 원장 시절 서방을 따라잡겠다는 생각으로 중국과학기술대학을 세우고 초대 총장을 맡았다. 3 허페이시는 ‘강남의 머리이자 중원의 목구멍(江南之首 中原之喉)’으로 불린다. 농업중심 도시에서 과학기술과 종합금융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안후이(安徽)성의 수도인 허페이(合肥)에서 가보고 싶은 곳은 중국과학기술대학이었다.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기 3년 전인 1986년 민주화 시위가 처음 일어난 곳이다. 나중에 중국 인권운동가가 되는 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방려지)는 이 대학 부총장이었다가 시위 이후 해임됐다.

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제3의 길이 중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상부구조는 일당독재이고 하부구조는 자본주의인 사회는 사회주의 유물론으로 봐도 기형적이다. 서방에서는 그 길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국민은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른 혼란이 예정돼 있다는 게 서방의 지배적 시각이다. 로버트 기포드는 『차이나 로드』에서 “중국인들은 이제 피자의 토핑을 고를 수 있게 된 데 만족하지 않고 결국 정치지도자들을 선택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썼다. 과연 당사자인 중국인들도 그럴까?

그것에 가장 가까운 사건이 천안문 사건이다. 89년 4월 15일 개혁파인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 총리의 추모 집회에서 시작돼 6월 4일 탱크에 의해 진압되기까지 천안문 광장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지속된 민주화 시위다. 이 사건은 지금도 금칙어다. 인터넷에서는 ‘허시에(和諧)’를 피해 ‘5월 35일(6월4일)’이라든지 ‘식사 한 끼 6위안 40마오(平飯六塊四)’라는 은어가 유통된다. 중국 정부가 사회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는 허시에(조화)는 인터넷에서 다양한 뜻으로 조롱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검열이라는 뜻이다. 식사를 뜻하는 ‘平飯’은 억울한 일을 풀어준다는 핑판(平反)과 발음이 같고, 가격 6위안 40마오를 뜻하는 ‘六塊四’는 6월 4일 희생자를 뜻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기억하려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수풀 우거진 캠퍼스에 자전거를 대놓고 일별하니 여기저기 남녀가 짝을 이루고 있다. 여자친구 무릎에 누워 있는 남학생에게 태어나기도 전의 시위에 대해 물어볼 만큼 주책없지는 않다. 상하이 인민광장처럼 정치토론 대신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곳이 된 것 자체가 변화를 상징한다. 분수대 한쪽 끝에 ‘중국의 괴테’라고 불리는 궈모뤄(郭沫若·곽말약)가 팔짱을 끼고 서서 교정을 보고 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직접 ‘郭沫若像’ 네 글자를 썼다는 설명이 동상 뒷면에 붙어 있다. 궈는 중국과학원 원장일 당시 이 학교를 세우고 초대 총장이 됐다. 지식인의 수난기인 60년대 중반 그는 마오쩌둥이 ‘우파의 대표’로 껴안아주는 바람에 홍위병의 포위에서 풀려났지만 11명의 자식 중에서 아들 두 명이 자살하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점잖게 연세 드신 분이 자전거를 타고 분수대를 맴돈다. 지구화학을 가르치다 은퇴한 이후 매일 이 시간 여기 와서 자전거를 탄다고 한다. 말을 붙여보는데 조심스러워한다. 중국에서 정치 풍향은 계절풍보다 탁하고 변덕스러웠다. 자신의 발언이나 논문은 스스로 발등을 찍는 도끼가 돼서 돌아오곤 했다. 그는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고 당연히 촬영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중국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처럼 궁금한 게 많다.

그는 영어를 고집했다. 나는 중국어를 고집해서 통역 없는 영중(英中) 대화가 오간다. 이민 간 집에서 아이들은 영어 쓰고 부모는 한국말을 쓰는 것과 유사하다. 희한한 건 둘 다 자신이 선택한 언어가 유창하지 않다는 점이다. 말이 막힐 때마다 나는 그의 영작을, 그는 나의 중작을 도와준다. 그는 86년 이곳에서 일어난 시위와 팡리즈에 대해 알고 있었다. 팡은 올해 4월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별세했다.

“동료 교수였는데 모를 리가 있는가.”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좋은 사람이다.”
“팡리즈는 민주화를 요구하다 망명했다.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가 망명한 게 아니고 중국 정부가 미국행을 허가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89년 시위가 무력진압된 다음날인 6월 5일 팡은 미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망명이 허용됐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그를 현상수배하면서 미국을 압박했고 미국은 그를 1년여 동안 보호했다. 헨리 키신저와 덩샤오핑의 직접 협상으로 그는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좋은 뜻으로 했겠지만….”
질문을 피해 나간다. 사실 중국에서는 정치 얘기하기가 편하지 않다.

“양전닝(楊振寧·양진녕) 교수는 잘 지내고 있는가?”

나는 경계를 풀기 위해 허페이 출신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의 근황을 물었다. 양전닝은 82세이던 2004년 28세의 웡판(翁帆·옹범)과 재혼했다. 그제야 이 노교수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칭화대에서 잘 지내고 있을걸…하하하.”

칭화대는 베이징대와 중국에서 쌍벽을 이루는 대학이다. 중국과학기술대학이 만약 개교할 때처럼 베이징에 있었으면 칭화 못지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입학하기 어려운 명문이긴 하지만 위치가 외진 탓에 손해 보고 있다.

“이 대학을 왜 여기로 옮겼는가?”
그는 정치적 이유라는 것 외에 입을 다물었다. 사실 민감한 질문도 아니다. 60년대 말 관계가 악화된 소련의 침공에 대비해 베이징의 주요 시설이 중국 전역으로 산개됐다. 중과대도 처음에 안후이성의 안칭(安慶)으로 옮겼다가 비좁아 허페이로 온 것이다.
그는 답은 안 해주면서 남북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이유와 북한에 대한 내 생각을 묻는다. 분단의 원인도 물었는데 내가 기껏 대답하자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나를 시험해본 것 같다. 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천안문 시위가 다시 일어날까?”
“중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정치지도자들이 이전에 비해 훨씬 좋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중국의 미래는 밝다.”

벤치에 앉아 있는 청년들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근처 IT업체에 다니는 프로그래머인데 점심시간 캠퍼스에 놀러왔다. 이들도 중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다. 내가 만난 농민 얘기를 하니까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어 농촌 형편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그들 고향도 농촌이다. 하지만 86년의 시위나 팡리즈에 대해서는 몰랐다. 공원에서 만난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들과 얘기하는 도중 노교수가 다시 다가왔다. 나한테는 뜬금없지만 오래 생각한 질문인 듯하다. “미국이 중국을 침공할 것으로 보느냐?” 중국 관영언론에서는 최근 미국이 호주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필리핀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해상봉쇄전략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의 바깥에서는 국력이 강해진 중국이 대외 강경노선을 취할 것을 우려하는데 중국에서는 정작 미국의 침공을 우려한다. 역사의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중국이 영토분쟁에서 더 공격적으로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권력자들이나 강대국은 위험할 수 있다.

소련은 미국의 침략이 아니라 군비경쟁에 경제력을 탕진, 내부에서 무너졌다. 중국도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미국의 위협보다 빈부 격차의 해소가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어쨌든 미국의 침공 가능성이 적다는 뜻으로 해석하고는 나를 구내식당으로 데려가 짜장면을 사줬다.

드디어 팡리즈를 아는 학생을 만났다. 물리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천충(陳沖·진충)이 두리번거리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지난해 자전거로 쓰촨(四川)성의 청두(成都)에서 티베트의 라싸까지의 촨짱(川藏)선을 다녀온 적이 있어서 짐자전거를 보고 반가웠던 것 같다. 총명하면서도 사근사근하다. 팡에 대해 머뭇거림 없이 말했다.

“나는 그가 훌륭한 학자이고 애국자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기에 그가 한 행동의 저변에 대해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의 행동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환경오염과 식품안전, 부패 같은 문제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하이와 난징을 거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난 대학생들은 모두 비슷하게 말했다. 이들은 정치구조의 개혁에 대해 무관심하다. 공산당 일당독재의 상부구조는 외려 시장경제에 의해 떠받쳐져 공고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를 역사의 종점으로 보는 서방의 시각은 시기상조인가? 아니면 아예 적용되지 않는 것 아닐까? 서구보다 더 오래된 중국의 역사로부터 현재를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왕조와 백성의 틀을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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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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