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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 털어 돌리기, 마구잡이 욕설 … 도 넘은 올림픽 오심 사이버테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중국인의 본성이 본래 더러워서 일어난 일이다.’(한 포털 사이트의 박태환 관련 뉴스에 달린 댓글)

 지난달 28일 인터넷 공간은 반중(反中) 감정으로 들끓었다. 이날 오후 벌어진 수영 남자 자유형 400m 예선에 참가한 박태환(23)의 실격 판정 때문이었다. 경기 직후 미국 스포츠전문채널 ESPN이 “박태환을 실격 처리한 것은 중국인 심판”이라고 보도하자 네티즌은 거세게 중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일부 네티즌은 중국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X같은 중국인이 심판을 매수했다’ ‘중국 XX들은 짝퉁이나 만들라고 해’ 등 비난 글을 남기기도 했다.

 런던 올림픽이 시작됨과 함께 인터넷 강국 코리아도 시험대에 올랐다.

 한국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초고속 무선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100.6%)다. 국내 네티즌은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이용량)의 10%(세계 2위)를 차지한다. 그런데 수영·유도·펜싱 등의 종목에서 한국 선수들에 대한 오심이 잇따르자 감정이 격해진 국내 네티즌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응어리진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일부 네티즌의 비난 수위가 도를 넘어서면서 ‘사이버 테러’ 수준이라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최첨단 정보기술(IT)이 빗나간 애국심과 접속하면서 올림픽을 지켜보는 세계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IT 강국의 그늘이다.

 국내 네티즌의 ‘사이버 비난’이 정점에 이른 것은 지난달 31일 펜싱 여자 에페 준결승전 신아람(26)과 브리타 하이데만(독일)의 경기 때였다. 연장 종료 1초 동안 세 차례 경기가 중단됐지만,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은 채로 재개됐고 신아람은 막판 공격을 허용해 패했다. 네티즌은 하이데만과 오심을 저지른 오스트리아의 바바라 차르 주심을 공격 타깃으로 삼았다. 인터넷과 SNS 공간에는 ‘나치의 후손 꺼져라’ 등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물론,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욕설까지 쏟아졌다. 하이데만의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이런 욕설을 직접 남기기도 했다. 결국 하이데만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일부 네티즌은 하이데만의 누드 사진까지 퍼날랐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독일판 모델로 나선 사진이 급속히 확산됐다.

 공격은 ‘신상 털기’로까지 이어졌다. 정보 검색에 익숙한 국내 네티즌은 차르의 전화번호·e-메일까지 알아내 공격 타깃으로 삼았다. 이런 소동은 독일의 디벨트(Die Welt)지에 그대로 보도됐다.

 대한체육회 박용성(72) 회장도 공격 대상이 됐다. 박 회장은 1일 “(유도 경기에서 판정이 번복된) 조준호의 경우 오심이 아니라 오심을 정정한 것” “국제펜싱연맹이 신아람에게 특별상을 수여할 것” 등의 발언을 한 뒤 네티즌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나라를 팔아먹을 XX” 등 비난이 폭주했다. 오심 논란과 관련해 네티즌에겐 피아(彼我) 구분이 없다는 해석이 나왔다.

 IT 전문가들은 “한국인 특유의 열정적인 애국심과 인터넷 강국 코리아의 IT 네트워크가 접목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서울대 김정효(체육철학) 박사는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올림픽에 대한 민족적 애정이 강했고 선수의 감정에 가족처럼 반응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이번 사건도 ‘강한 애국심’이 잘못 표출된 사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가 심판의 신상 털기나 SNS에 인종차별이나 성적 비하 막말을 쏟아내는 등의 ‘사이버 테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경희대 윤성이(정치외교학) 교수는 “서구에서는 인터넷에서도 토론사이트가 발달돼 여론몰이에 앞서 논쟁이 진행된다”며 “감정적 여론몰이가 일상화된 한국의 사이버 문화를 재점검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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