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북한은 경제 우선으로 가는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김정은의 행동은 북한 기준으로는 상궤(常軌)에서 많이 벗어난다. 미키마우스 캐릭터가 등장한 모란봉악단 공연에서 김정은과 그의 아내가 박수를 치면서 즐기는 모습은 초현실의 팬터지 같았다. 군부 강경파의 상징이던 인민군 총참모장 이영호 숙청은 서릿발같이 과감했다. 놀랍고 반갑다.

 각국 정부와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파격적인 행동과 전광석화 같은 요직 인사가 북한의 노선 변화를 예고하는가를 놓고 말이 어지럽다. 누구의 눈에는 이런 일들이 북한의 국가전략이 선군(先軍)에서 실용적 경제 우선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신호로 비치고, 다른 눈에는 그런 것들은 김정은이 민심을 얻고 권력 장악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극장정치’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북한 현상을 보는 시각에 진영논리가 작용한 탓이다. 탈이념적, 가치중립적, 실증적 접근이 절실하다. 판단 자료는 세 부류다. 김정은의 말(語錄), 파격 행보, 북한의 외교활동이다. 순서대로 보자.

 김정은은 4월 15일 태양절 열병식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당의 확고한 결심이다. … 이제 우리는 경제강국을 전면적으로 건설하는 길에 들어서야 한다.” 노동신문은 6월 29일 정론에서 “선군정치로 국력이 다져진 조건에서 이제 경제강국의 용마루에 올라서야 한다”고 화답했다. 김정은은 당 중앙위원회 간부들과의 담화에서도 “우리는 인민생활 향상과 경제강국 건설에서 결정적 전환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은이 부인과 함께 모란봉악단 공연을 관람하는 장면은 세계적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촉발했다. 짧은 치마의 무희들이 미키마우스 캐릭터의 주인공들과 춤을 추는 장면은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북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미키마우스는 북한 당국이 독설을 퍼붓는 미국 자본주의 퇴폐문화의 전형이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는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개혁·개방을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국, 특히 미국 자본과 기술에 묻어 들어올 자본주의 병균이 북한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걱정이다. 김정은이 그 퇴폐문화를 앞장서 수용한다. 북한을 경제·사회·문화적으로 고립시켜 온 완고한 철문에 반가운 틈이 생긴 것이다.

 ‘경제강국’ 건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외교활동도 괄목할 만하다.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김영남은 5월과 7월 두 차례나 동남아시아를 순방했다. 합영투자위원회 위원장과 경공업상이 그를 수행한 것만 봐도 그의 동남아 방문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는 유도요노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요청하는 김정은의 초청장을 전달했다. 당 대외연락담당 비서 김영일도 같은 시기에 라오스와 베트남과 미얀마를 돌았고, 외상 박의춘은 7월 아세안 지역포럼에 참석한 기회에 자원이 많거나 경제개발의 모델이 되는 나라 외상들과 연쇄회담을 가졌다. 북한은 인도네시아와 미얀마에서는 식량을 확보하고, 싱가포르와 베트남에서는 경제개혁을 벤치마킹하는 데 힘을 쏟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대외 경제관계의 다변화는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날 구체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실적들을 보면 백성들이 더는 배고프지 않게 하겠다는 김정은의 말이 권력 안정을 위한 선전만은 아니라는 희망이 생긴다. 김정은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10대에 스위스에 유학했다. 세계에서 생활수준이 가장 높고 가장 민주적인 나라 스위스. 아버지 시대에 심층심리 깊은 곳에 잠재해 있던 김정은의 ‘스위스 유전자’가 눈을 뜬다고 해서 놀라울 것이 없다. 이영호로 대표되는 군부 강경파는 김정은의 경제우선 정책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이영호의 숙청은 불가피하고 환영할 일이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북한 선수들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善戰)하는 것도 국제무대에 나서는 김정은에게 힘을 보탤 것이다. 김정은은 적절한 시기에 중국을 먼저 방문해 놓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할 것이다. 2008년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연주에 대한 답방 형식의 평양교향악단의 미국 공연으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남한에 대해서는 12월 대선에서 집권당 후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조치는 피하겠지만 김정은 집권 후 처음으로 현대아산 관계자들의 금강산 방문을 허용한 것은 의도적이고 의미 있는 조치로 보인다.

 내년 2월까지 남북한과 한반도 주변 4강 모두 지도자 교체를 끝낸다. 김정은이 주도하는 북한의 변화가 그때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그 흐름이 북한의 도발이나 핵실험 같은 돌발사태로 중단되지 않는다면 내년 봄에는 한반도에 역사적인 전환의 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