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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벨기에 청년, 한국 최초 여성 올림픽 대표선수에게 편지를 보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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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여자가 저 혼자이기 때문에 좀 섭섭해요. 앞으로는 이런 대회에 우리 조선 여성도 많이 참가하도록 해주기를 미리 부탁해요. 그러나 오빠선수들이 저만큼이라도 가게 되니 퍽이나 마음이 든든해요. 조선 여성을 대표해 아니, 전 조선 민족을 대표해 나가는 만큼 조선 사람도 이렇다는 것을 뽐내도록 힘을 다할 작정이요. 기록이라고요? 과히 뒤떨어진 것 같지 않아요.”(‘올림픽 필승의 결의’, 동아일보, 1948.6.20) 1948년 6월 22일 저녁 9시, 부산부두에는 수만 명의 조선인이 몰려와 있었다.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떠나는 국가대표선수단을 환송하기 위한 인파들이었다. 우리 국기를 달고 참가하는 첫 올림픽인 만큼 그 흥분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 중에는 올림픽대표단의 홍일점으로 참가하게 된 19살의 이화여중생 박봉식의 가족들도 섞여 있었다.

 박봉식은 한국 최초로 올림픽에 참가한 여성 선수다. 그녀는 런던 올림픽에서 원반던지기 종목에 참가했지만 원래는 빙상 선수로 시작해 국내 대회를 석권했고 높이뛰기, 투포환 등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던 다재다능한 스포츠선수였다. 그녀가 원반던지기 선수가 된 것은 1948년 4월 26일에 치러진 국내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는 놀라운 성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그녀의 기록에 열광하며 “박봉식양의 올림픽 파견 문제는 조선여성체육발전의 앞날을 위해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녀의 사연은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으며 벨기에의 한 청년이 그녀에게 팬레터를 보내기도 했다. 운동을 좋아한다는 스탠리 E. 웨이스라는 안트베르펜 대학생이 그녀의 기사를 읽고 그녀에게 응원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 청년은 편지에서 박봉식에게 영국에 온 감상, 승리의 기록, 조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녀의 친필 서명을 넣은 답장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양의 승리를 축원합니다’, 자유신문, 1948.7.31).

 비록 그녀는 런던 올림픽에서 예선 탈락했지만 그녀의 실력이라면 차기 올림픽에서는 반드시 입상할 수 있을 거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한국전쟁 중에 사망해 다시는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64년 만에 다시 런던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의 여성 선수의 수는 총 245명 중 절반에 가까운 111명이라고 한다.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이 수많은 ‘박봉식의 후예들’이 그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룰 수 있길 빈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