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장제스, 황포군관학교서 ‘혁명’을 길러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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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6월 16일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1기생 입학식에 참석한 쑨원(가운데). 오른쪽에 군복을 입고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이가 교장 장제스다. [사진 김명호 교수]

중국 남부의 무역도시 광저우(廣州).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광둥성(廣東省) 성도(省都)다. 중국 근대화 과정의 혁명 도시로도 유명하다. 21일 오후 광저우 외곽에 위치한 황포군관학교. 1924년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1866~1925)이 창건한 군사학교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한 제1차 국공합작의 성과물로 평가받는다. 섭씨 30도가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성공회대 김명호(62) 교수가 목청을 높였다.

 “20세기 중국을 한마디로 묘사하면 혁명입니다.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근대화 혁명의 산실인 광저우죠.”

 김 교수는 최근 『중국인 이야기1』(한길사)을 냈다. 중앙일보 일요판 신문인 ‘중앙SUNDAY’에 6년째 연재 중인 ‘사진과 함께하는 중국 근현대’를 다듬은 책이다. 앞으로 10권으로 완성될 그의 답사 여행에 동행했다. <본지>6월 13일자 26면>

 “20세기 초반 광저우는 온갖 이념과 혁명이 한데 얽혀 들끓은 용광로였습니다.”

김명호 교수가 중국 근대화 혁명의 요람인 황포군관학교를 가리키고 있다. [배영대 기자]

 21세기 광저우는 북적댔다. 1980년대 말 김 교수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자동차가 거의 없었다는데 지금은 시내를 통과하려면 교통체증을 감수해야 했다. 황포군관학교를 비롯해 광저우 곳곳에는 쑨원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었다.

 김 교수는 중국 근대화 혁명과 관련해 장제스(蔣介石·1887~1975)를 특별히 주목했다. “장제스가 없었다면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장제스는 쑨원의 천거로 황포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에 올랐고, 이후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장제스가 양성한 인재들이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주역이 됐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일반 역사책에서 잘 볼 수 없는 내용을 풀어놓았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우파와 좌파로 대립시켜 놓고 보는 오늘날의 관점이 형성되기 전인 20세기 초, 그들의 이념적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제스가 소련 공산화 이후 모스크바에 유학하면서 스탈린의 총애를 받았다는 설명도 이채로웠다. 1927년 장제스가 공산당 타도로 노선을 바꾸기 이전의 일이다.

“훗날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를 물리치는 데 앞장서는 중국 공산군 전략가 린뱌오(林彪)도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죠. 보면 볼수록 재평가하게 되는 인물이 장제스입니다. 천안문 광장 마오쩌둥 초상화 옆에 장제스 초상화도 함께 걸어놓자고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죠.”

 오늘의 중국을 만든 인물을 기리는 중국인에게서 일종의 여유가 감지됐다. 황포군관학교는 현재 청소년 수련관 역할을 겸하고 있다. 중국 청년들은 이곳에 입소,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간 훈련을 받으며 정신과 체력을 단련한다.

 쑨원의 이름을 딴 중산(中山)대학도 방문했다. ‘근대 중국 18선현(先賢) 동상 광장’이 눈에 띄었다. 쑨원을 비롯해 근대화 주역 18명을 선정해 동상을 세워놓았다. 대부분 정치인·군인이었는데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와 번역가 옌푸(嚴復)도 포함시켰다. 근대사에 대한 중국인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광저우=배영대 기자  

◆김명호=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중국 관련 희귀 자료를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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