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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다시 읽기] 주자어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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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네 명의 황제를 섬겼지만 지방관으로 외지로 나간 것은 겨우 9년, 조정에 섰던 것은 단 40일뿐이었다. " 주자, 즉 주희(朱熹.1130~1200)의 일생을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는 구절이다.

임지에 가지 않아도 봉급을 주는 사록관(祀祿官 : 도교 사원 관리인)제도가, 그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 덕에, 독서와 저술 그리고 교육에 전념할 수 있었다. '주자학' 내지 훗날 '신유학(新儒學)' 으로 불리는 거대한 담론 체계는 그렇게 탄생했다. '송학(宋學)' 으로도 불리는 사상 운동이 열매를 맺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공자.맹자의 원시 유학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연속성' 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불교와 도교에 대한 배척과 비판을 거쳤다는 점에서, 또한 그 과정에서 '적' 들의 장점(우주론과 형이상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단절성' 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유학이었다.

『주자어류』는 그같은 담론 체계의 형성 과정, 구조와 성격 그리고 장대한 스케일 등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들려준다. 주자가 나눈 대화, 문답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語錄)으로, 시기적으로는 그가 41세부터 죽기 직전까지의 30년간, 그러니까 완숙기의 사상을 모아놓았다.

'어록' 이라는 점에서는 『논어(論語)』와도 일맥상통한다. 당나라 선승(禪僧)들 사이에서 그런 형식이 유행했으며, 그런 경향이 송대 유학자들에게도 이어졌다. 그 질과 양에 있어 『주자어류』는 가히 압권이다.

현재의 모습은 문인들의 '어록' 을 토대로 여정덕(黎靖德)이 주제별로 재편성한 것이다. 정식 명칭은 『주자어류대전(朱子語類大全)』. 전체 1백40권. 죽은 지 70년 후의 일이었다(1270년).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를 보면, 기초 이론에서부터 학문방법론, 고전해석학, 학설사, 동시대인 비평, 이단론, 역사철학, 잡류, 문학론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활하다. 우주의 삼라만상에 관한 논의가 다 담겨 있다. 정합된 체계를 가진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관에 대한 문답식 설명인 셈이다.

거기서 우리는 훗날 존숭받는 주자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한 인간으로서의 주자를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끊임없이 수정해가는 모습, 최대의 논적 육상산(陸象山)과의 논쟁, 동시대인들에 대한 비평 그리고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 등….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 주자학은 '일존(一尊)' 의 지위를 누렸다. 양명학조차 미미할 정도였으니까. 그 틀 안에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등 유례없는 고도의 형이상학 논쟁을 전개해갔다. 그 치열함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지나친 편향성, 그리고 유학사에서 주자학이 갖는 '단절성' 에 대한 자각의 결여라 하겠다.

전통에의 침잠, 현실과의 격투, 그 위에 과감한 단절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열어젖힐 때, 학문의 가치는 진정 빛난다. 실로 주자가 그러했다. 허나 점차 권위를 갖게 되고, 나아가 교조화.우상화되는 순간 주자학은 '살아있는 학문' 을 넘어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에 가까운 그 무엇으로 변해갔다. 필자가, 조선조의 형이상학 논쟁과 지난날 운동권의 'NL-PD 논쟁' 사이에 기묘한 유사성을 느끼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여러 판본이 있으나,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찍은 『朱子語類』 8책(王星賢 點校.1994)은 쉽게 구할 수 있다. 표점이 찍혀 있어 편리하다.

연구는 일본이 앞서가고 있다. 『朱子語類人名地名書名索引』(中文出版社.1979),『朱子語類'口語語彙'索引』(中文出版社, 1988) 등의 공구서(工具書)가 물증이 된다. 『朱子集』(吉川幸次郞.三浦國雄, 朝日新聞社, 1976),『朱子學大系』(明德出版社.1981)의 제6권(전체 10권)은 『주자어류』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지금도 번역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말 번역은 최근에야 이루어졌다. '리기(理氣)' '귀신(鬼神)' '성리(性理)' 편을 역주한 『주자어류』 1, 2권(허탁.이요성 역주, 청계, 1998)에 이어, 주자학의 공부론(工夫論)을 다룬 3, 4권이 이번에 새로 번역되었다. 앞으로 계속 번역될 예정이다. 갈 길은 여전히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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