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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況속 好況에 카드사 표정관리 고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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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L카드사 김모(34) 과장은 지난달 회사로부터 두툼한 봉투를 하나 받았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특별 성과급. 팀장으로부터 봉투를 받아든 김과장의 오른손이 잠시 떨렸다. 자신도 믿기지 않을 만한 액수였다. ‘성과급 8백%, 액수 1천만원.’

연말부터 특별 보너스가 나온다는 얘기는 흘러다녔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대학교 동창회 모임에서도 김과장의 특별 성과급은 단연 화제였다. 김과장은 “친구들이 연신 부러워하는 바람에 부담스러울 정도였다”고 털어놓았다.

벤처도 죽고 증시마저 고사(枯死)된 마당에 특별 상여금은 꿈속의 얘기다. 월급이 깎이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스럽다. 성과급은 한 마디로 샐러리맨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다.

하지만 신용카드 직원들만은 예외다. LG·삼성·국민·외환 등 대부분 신용카드사 직원들은 3백∼8백%의 특별 보너스를 받았다. S카드사의 장모(43) 부장은 “빈곤 속에 풍요를 누리는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카드사들이 돈 잔치를 벌일 수 있게 된 것은 사상 유례 없는 호황을 누리면서다. 카드업계가 지난 한 해 어느 정도 돈벌이를 했는지 몇 가지 숫자를 짚어보자.

카드로 사용된 금액은 2백24조원. 전체 국가 예산의 두 배가 넘는 규모다. 박세동 여신금융협회 이사는 “10년 전의 12조6천40억원과 비교해 거의 20배나 증가했다”고 말했다. 카드 사용액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카드사의 호주머니는 두둑해진다.

카드발급 숫자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지난 90년까지만 해도 1천만 장에 불과하던 카드발급 수는 지난해 들어 5천7백만 장으로 불어났다. 경제활동 인구가 2천만 명이라고 할 때 한 명당 2∼3매씩 돌아가는 숫자다.

가맹점 수의 증가는 더욱 놀랍다. 지난 90년 58만6천 개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8백60만 개나 된다. 카드를 받는 장소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얘기다.

외형이 커진 데 힘입어 카드사의 수익도 가파르게 치솟았다. 카드사의 시장독점 여부를 조사한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카드는 당기 순이익이 2년 전에 비해 33.3배, LG캐피탈은 9.9배, 비씨카드는 4.9배가 각각 증가했다”고 밝혔다.

결산을 마친 카드사들이 낸 세금(법인세)도 엄청나다. LG·삼성 등 메이저 카드사가 낸 세금은 1천7백억원이나 된다. 국민이나 외환카드도 5백억∼1천억원의 세금을 냈다. 1년 전에 비해 2∼3배나 세금을 더 냈다.

국세청의 세수증가에 톡톡히 기여한 ‘효자둥이’가 카드사다. 외환위기와 최근의 경제침체에 비춰보면 확실히 ‘돌연변이’라 할 만하다. 김승보 녹색소비자연대 사무처장은 “경기가 꺾이고, 증시가 죽고, 수출이 죽을 쑤고 있지만 카드업계만은 기를 펴왔다”고 말했다.

신용카드업계는 80년대에 국내 영업을 시작한 이래 지난해 황금기에 접어들었다. 경제는 침몰하는데 유독 카드업계만 돈 잔치를 벌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가 나빠지고 있으니 카드업도 불황을 겪는 것이 경제논리로 보면 맞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정부가 소득공제 혜택과 영수증 복권제라는 ‘당근’을 내놓으면서다. 카드 사용액은 99년에만 해도 90조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득공제와 영수증 복권제가 시행된 지난해에는 2백24조원. 불과 1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소득공제와 복권제는 순식간에 신용카드 사용 붐을 불러왔다. ‘1만원 소액결제도 카드로 하자’는 분위기가 퍼져 나갔다.

현금서비스의 폭발적인 증가도 카드사의 호황에 밑거름이 됐다. 현금서비스 비율은 현재 전체 카드 사용액의 평균 65%를 넘는다. LG나 삼성의 경우는 비율이 거의 70%를 차지한다.

현금서비스는 사실 카드사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벌이 수단’의 하나다. 돈을 빌려주고 받는 수수료율이 25∼28%나 된다. 시중대출금리가 6∼7%임 점에 비춰보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만하다. 카드사가 자금을 끌어오는 데 무는 금리가 10%를 넘지 않으니 ‘폭리를 취한다’는 말도 억지만은 아니다. 공정거래위가 최근 국내 7개 카드사에 80여억원의 과징금을 물린 것도 폭리에 제동을 걸려는 조치다.

카드사들 입장에서는 돈이 되다 보니 쌍심지를 켜고 회원 늘리기에 매달린다. 그러다 보니 길거리는 온통 카드유치를 하는 가판으로 어지럽다. 서연경 YMCA 시민중계실 간사는 “가판을 깔고 학생, 무직자, 노숙자 등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카드를 마구 발급하는 식의 과당경쟁은 자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카드업계의 미래는 마냥 장밋빛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항로가 순탄하지만은 않다. 빙벽(氷壁)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악성연체가 우선 문제다. 경기가 바닥을 기면서 빌린 돈을 갚지 않는 연체사례가 이미 늘어나고 있는 조짐이 엿보인다. 이명호 비씨카드 홍보과장은 “연체율이 아직은 5∼6%대에 머물고 있지만 늘어날 조짐이 많다”고 말한다.

경기침체에다 실업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최근 연체사례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카드업계의 고백이기도 하다. 연체액이 늘어나면 벌어들인 돈을 까먹는 것은 시간문제다.

경기불황도 카드업계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난해에는 불황을 크게 타지 않았지만 올해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경기지표가 갈수록 나빠지는데다 실업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호황을 장담하기 어렵다.

카드업계의 짝짓기 움직임도 변수다. 외환카드 인수작업을 벌이고 있는 씨티은행의 등장은 국내 카드업계로써는 첫번째 시험대다.

미국 씨티그룹 계열사인 씨티은행은 LG·삼성·국민 등 기존 카드사로선 무척 위협적인 존재다. 씨티은행이 국내영업을 오랫동안 해왔고 막대한 자본과 선진 금융기법으로 치고 들어올 경우 시장잠식은 불가피하다. 동양카드를 인수한 SK도 카드사업에 진출한다.

동양카드 인수전에서 SK에 밀린 롯데직원들에게 얼마 전 엄명이 하나 떨어졌다. 신용카드업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보라는 지시가 그룹차원에서 내려왔다. 매물로 나와 있는 다이너스는 물론 조흥은행과 평화은행 카드사업 부문의 인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행보도 당연히 빨라졌다. 롯데그룹 관계자들은 신동빈 그룹 부회장이 사활을 걸고 카드업 진출을 추진하라는 주문이 부쩍 많아졌다고 전한다.

롯데그룹 관계자들은 실제로 카드업계 기자들을 만나 카드업계의 최근 동향을 묻고 다니는 것으로 확인됐다. 다이너스카드는 지난해부터 줄곧 임자를 찾아왔으나 대우가 떠넘긴 엄청난 부채 때문에 매각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채권단의 하나인 자산관리공사가 마침내 올초 CRV(기업혁신회사)를 통해 매각이 추진되는 쪽으로 일단 방향을 잡았다. 신동욱 다이너스카드 사장은 “매각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정부가 과연 재벌기업들의 신규 독자진출을 허용해 주느냐다. 재정경제부 관리들은 종종 “시장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오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 독자진출 허용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놓았다. 그러나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카드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다”라는 말로 신규진입 허용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정부가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에 따라 카드업계는 앞으로 적지 않은 변화를 맞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카드시장은 앞으로 좋든 싫든 춘추전국시대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됐다. 삼성·LG·SK 등 재벌 그룹간의 경쟁에다 씨티은행 등 외국계 카드사의 가세는 피 튀기는 ‘영토전쟁’을 예고한다.

이완수 내외경제신문 소비자팀 기자 wslee@ned.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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