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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고종 옷을?한국 드라마는 왜 이러는 걸까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난주 영화 ‘후궁:제왕의 첩’의 조상경 의상감독과의 인터뷰 도중 그가 드라마 의상에 대한 얘기를 했다. 한복을 연구하기 위해 TV 사극을 많이 봤는데, 우리 드라마에서 ‘의상’의 역할이 매우 적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의 인기 드라마 ‘빅뱅이론(사진)’을 예로 들었다. “미국 드라마엔 전체 의상을 다 관할하는 커스튬 디자이너가 있어요. ‘빅뱅이론’을 봐도 그렇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배우의 연기에만 힘을 주고 의상의 역할은 미미해요.”

‘빅뱅이론’의 주인공은 4명의 괴짜 과학자와 1명의 웨이트리스다. 꼭 챙겨야 할 의상이라면 웨이트리스의 앞치마 달린 유니폼 정도고, 나머지는 적당히 캐주얼을 입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4명의 과학자는 각자 뚜렷한 드레스코드가 있고, 입고 나온 옷만으로도 캐릭터의 특징이 연상될 정도다. 그중 셸던 쿠퍼(짐 파슨스)를 보자. 아이큐 180에 11세에 대학에 들어가 16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천재 물리학자지만 사실상 사회부적응자에 가깝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고집불통이고 편집증에 강박증까지 가졌다. 사회성 제로에 사교성도 없다.

그런데도 미워할 수가 없다. 그가 사실은 냉소와 반어법을 이해할 줄 모르고 거짓말과 비밀에 발을 동동 구르는 유약한 소년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마저 귀엽게 보이는데, 미성숙한 천재 캐릭터를 구체화하기 위한 몇 가지 장치가 있다. 비디오게임을 좋아하고 만화책과 피규어에 집착하고 ‘스타트랙’을 숭배하는 그의 취미와 옷 입는 스타일이다.그는 늘 티셔츠 차림이다. 다채로운 색깔의 티셔츠엔 눈에 띄는 그래픽이 그려져 있다. 주로 등장하는 그림은 수퍼맨, 배트맨, 그린랜턴, 플래시 등 DC코믹스의 수퍼히어로들이다. 이런 티셔츠 하나만으로도 어린애 같고 ‘오타쿠’ 같은 그의 기질을 더 확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얼마 전 100회 특집으로 제작한 드라마 메이킹 필름에서 출연자별로 잘 정리된 ‘빅뱅클럽’의 드레스룸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어떨까.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 위로 ‘○○○ 원피스’ ‘◇◇◇ 블라우스’ 라는 협찬 브랜드의 이름이 더 눈에 들어온다. 물론 엔딩크레딧엔 의상, 의상 디자이너, 팀 코디 등 의상 스태프의 명단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들의 일은 우리가 ‘코스튬 디자이너’라 부르는 이들의 것과는 달라 보인다.

드라마 제작 관계자에 따르면, 의상 담당자는 주로 단역과 조연급을 맡는다. 주연급 스타들은 전담 스타일리스트가 있고 협찬하겠다는 브랜드들이 줄 서 있으니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감독이 캐릭터에 맞는 의상 가이드라인을 준다. 이를테면 ‘직업이 변호사니까 슈트를 단정하게 입자’ 같은 것들이다.

알고도 속아주는 게 드라마니까 그냥 보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상경 감독은 말을 이어갔다.
“한복도 마찬가지예요. 시중에서 팔릴 만한 옷을 협찬하다 보니까 (시청자들이) 조선 후기 한복에만 익숙한 것 같아요. 의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협찬 의상에만 의존하다 보니 세종이 고종의 옷을 입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해도 알아채지 못하는 일이 적지 않아요.”
아카데미 의상상을 세 차례 수상한 영국 출신의 커스튬 디자이너 샌디 파월은 “어려서부터 옷을 좋아했지만 패션디자이너를 꿈꾼 적은 없다”고 했다. “패션 디자이너의 일은 그저 옷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다.

의상 감독이 그저 옷을 구해 입히는 사람이 아니듯 극에서도 옷은 하나의 캐릭터일 텐데, 우리 드라마에서는 어째서 캐릭터가 살아있는 옷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걸까.
최효종이 ‘개그콘서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주인공이 가난하다고? 역할 따윈 중요하지 않아. 얼마나 예쁜 배우가 가방을 드느냐가 더 중요해.” 우리에게 ‘옷이 말하는 대사’는 아직 중요하지 않은 걸까.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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