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년도 넘은 對시베리아 천수답 외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9호 30면

계륵(鷄肋). ‘닭갈비’라는 뜻이다. ‘먹을 건 없고 버리기엔 아까운 것’을 뜻한다. 한국과 시베리아의 관계가 딱 이렇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민족 DNA엔 시베리아가 닿아 있다. 우리가 속한 우랄-알타이어족은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활약했고 가까운 조상들도 시베리아에서 말을 달렸다. 러시아가 18세기 말 연해주까지 차지한 뒤에도 여전히 한민족은 그곳에서 움직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옆 우수리스크엔 독립운동가의 마을인 신한촌이 있었다.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무대이기도 했던 시베리아는 지금 우리로선 상상이 안 되는 광활한 공간이다. 대한독립군이 레닌의 적군(赤軍)에 학살된 자유시 사변도 시베리아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가까웠다.

안성규 칼럼

그런데 오늘 그곳은 참 멀다. 옛 소련 시절 수십 년간 닫혀 있었고 아직도 쉽게 가는 곳이 아니다. 사람이 살 만한 여름은 짧고, 혹한의 겨울은 길다. 러시아 국토의 36%나 될 만큼 면적이 넓지만 인구는 500만~600만 명에 불과하다. 그러니 여행이면 모를까 경제 관점에서 보자면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한국의 대(對)러시아 경제 통계는 이를 확실히 보여준다. 지난해 교역은 211억 달러였는데 수출 주종은 상품이다. 투자는 올 3월 말 현재 누계액이 19억4000만 달러로 한국의 대외투자(1993억 달러) 가운데 1%가 안 된다. 그나마 교역·투자는 우랄산맥 서쪽에 집중된다. ‘시베리아의 미래’에 대해 한국이 말을 많이 하지만 행동은 굼벵이다.

그런데 계속 그래도 될지 좀 걱정스럽다. 특히 푸틴 3기의 러시아 정부가 눈에 띄게 시베리아에 정성을 쏟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쇼이구 전 비상계획부 장관은 4월 23일자 코메르산트 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지도부의 속내를 내비쳤다. “푸틴 대통령이 시베리아에 관심을 보통 쏟는 게 아니다. 하원에서도 얘기했고… 그런 푸틴이 내겐 새로운 게 아니다.” 푸틴은 5월 21일 대통령령으로 극동부를 만들고 장관도 임명했다. 시베리아를 연방 부처 차원에서 관리하긴 처음이다. 모스크바·하바롭스크 사무실에 각각 240명, 200명의 관리를 배치하고 산업부ㆍ농업부 등에 흩어진 업무도 집중시킨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9월 7~8일 열리는 아태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위해 루스키섬을 개발하고, 도시를 정비하고, 대형 다리를 연결하는 프로젝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시베리아 중시 전략이다.

거기엔 아시아 시대에 동참하기 위해 시베리아ㆍ극동을 진출기지로 삼겠다는 의지, 전 국토 균형 발전의 필요성이 깔려 있다. 또 푸틴이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라며 제시한 유라시아 동맹 구상, 태평양 진출 같은 전략적 요소도 얽혀 있다. 문제는 쇼이구의 말대로 20년간 1200조원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도 투자 중이지만 외국 투자유치도 바란다.

투자 유치의 대상은 한국과 일본이다. 일본에 대해선 분쟁 지역인 쿠릴 4개 섬 중 두 개 섬 반환으로 유혹하는데 일본은 다 달라고 해 좀체 진전이 없다. 중국에 의존하다간 ‘자칫 시베리아를 점령당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래서 한국에 기대한다. 그러나 시베리아를 계륵처럼 여기는 한국 기업엔 쇠귀에 경 읽기다. 투자 리스크가 엄청난 그 땅을 왜 가야 되나.

한때 시베리아에 관해 웅장한 구상들이 부침했다. 지금도 대우조선이니, 포스코니 기업 이름이 거론되지만 대개 설익은 단계의 얘기들이다. 국내 대기업 사장을 지낸 한 인사는 “기업에 리스크를 기피하려는 풍토가 깔렸고 리스크 담당 부서도 없어졌다. 가까운 중국 시장이 있는데 시베리아에 가겠다는 도전정신을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사실 시베리아 진출은 기업에 맡길 일이 아니다. 러시아의 전략적 가치, 한·중·일의 동북아 주도권 다툼, 한·미 동맹, 신성장 동력 확보 가능성, 에너지 안보 같은 굵직한 주제가 깔려 있어서다. 푸틴의 정열을 등에 업은 시베리아는 이제 그레이트 게임의 마당이 될 전망이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 청와대나 외교부의 ‘시베리아 큰 구상’은 듣지 못했다. 그런 구상을 하기에 주러 한국대사관은 너무 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애를 쓰는 총영사관은 너무 작다. 기업들도 남이 먼저 길을 닦아주기를 기대한다. 극동문제연구소 티타렌코 소장은 러시아는 한국의 시베리아 투자를 기대했지만 20년 동안 뭘 했나. 이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떨어졌다고 말한다. 누군가 먼저 길을 닦아 주기만 기다리는 시베리아 천수답 외교를 우리가 반성할 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