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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미 쇼코 〈폭풍남아〉

중앙일보

입력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유럽을 무대로 한 만화라면 지겹게 나왔을 서양의 귀족 제도와 작위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런 작위가 일본에도 버젓이 있었음을 아시는지?

당연히 일본 특유의 것은 아니다. 일본은 100여년 전부터 새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일본의 서양 따라잡기는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유럽의 고성을 통째로 뜯어다가 그들의 땅에 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그 당시의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제도를 여러모로 본받았는데 이때 고유의 역사를 가진 일본에 맞게 변형하기보다 거의 맹목적으로 흡수해 끼워 넣은 것에 가까웠다. 이런 작위 제도는 영국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역사 이야기를 먼저 꺼냈냐 하면 일본에는 이 작품의 주인공 '아티볼트 스티븐스' 같은 영국인 집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 어린 집사'라는 설정은 만화적인 과장이지만, 그런 과거와 인식을 가진 나라니 '집사'라는 다분히 서구적인 존재, 그것도 금발 벽안의 집사가 만화에 등장한대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와모노리 아라시는 갑자기 대부호 할아버지의 뒤를 이으라는 명목으로 납치되다시피 끌려왔다. 시시하게 그러나 내키는 대로 살았던 시절과 그는 영원히 이별을 고하게 된다. 그런데 말이 집사지 집안의 실세인 스티븐스의 가혹한 후계자 교육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많이 들어본 뻔한 기본 토대를 가지고 엉뚱한 장난을 치는 것이 작가 코나미 쇼코의 특기 중 하나.

이 순간부터 이 만화는 끝없는 과장, 말도 안돼는 허풍, 허를 찌르는 황당함이 전체에 깔리게 된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쉽게 말해 사제관계와 비슷하다. 물론 이 교육이라는 것도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다. 진지할 리도 없다. 오로지 시트콤 같은 가볍고 코믹한 소재만이 줄을 잇는다.

본디 집사라는 것은 집안의 살림을 관리하는 지배인격인데 아무리 봐도 스티븐스의 권력 남용은 지나치고 이에 맞서는 얼빠진 녀석이지만 반사 신경과 적응력이 뛰어난 아라시도 결코 만만치 않다.

이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기괴하기 짝이 없어서 엔젤이라는 이름을 가진 근육질 외모에 가녀린 심성을 가진 정원사. 근사한 악당이란 것도 역시 어려운 것임을 증명한 자질부족의 악역 카케무샤. 지나치게 넓은 집안에서 행방불명돼 타잔처럼 살아온 표범가죽 소녀 등 괴상한 캐릭터들로 바글바글하다.

도대체가 깔끔한 외모의 스티븐스도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채찍을 들고 안대와 개목걸이를 채워 주인을 끌고 다닐 생각은 못할 것 아닌가? 독자들은 이들이 벌이는 유쾌한 소동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작가는 권력의 차이가 부르는 재미, 사제관계라는 위치의 재미를 그저 우스꽝스럽게만 표현한다. 아리시의 인권이란 건 염두에도 안 두는 것 같다. 서민 소년이 갑자기 대제벌의 후계자 노릇을 하기란 만만치 않다. 그래서 스티븐스는 가차없이 아라시에게 채찍을 휘두른다.

스티븐스는 돌아가신 아라시의 할아버지를 동경하고 존경해 그의 집사가 되어 시중 드는 것만이 평생의 꿈이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어딜 보아도 완벽한 집사인 아버지는 그에게 라이벌이고 목표이고 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고로 함께 세상을 떠나고 스티븐스는 헤어날 수 없는 상실감에 시달린다. 대신 아라시를 그가 만족할만한 후계자로 키워내는 것이 그의 사명이 되었다.

본질을 말하자면 이 만화는 '신분상승'이라는 저급한 망상을 슬쩍 숨기려 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보게 되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여전히 순정 만화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났다. 진보적인 만화도 현대적인 만화도 확실히 아니다.

그러나 저변에 깔린 주인공의 심리에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잘난 체의 왕자 스트븐스지만 그에게는 정신적인 상처가 깊다.

혼자 아들을 기른 아버지는 완벽한 직업인이었을지는 몰라도 좋은 아버지는 못되었다. 작가 코나미 쇼코는 '아동학대'라는 무거운 코드를 이런 단순한 오락 만화에 등장시켰다. 바로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트렁크 안에 가둬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폐쇄 공포증까지 걸리고 만 그는 밤마다 동화책을 읽어주며 정신적인 아버지 노릇을 했던 자상한 전주인의 그림자에서 못 벗어난다.

결국 아라시에게 할아버지의 탈을 쓰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뿐이다.
사실은 그 할아버지도 자기 자식은 제대로 못 거둔 실패한 부모였다는 것을 망각한 채.

결국 둘 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둘 다 노력한다라는 뻔한 결론으로 맺어져 이 만화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작가가 꽤 깊이 있는 연구 끝에 만든 캐릭터임이 여기서 보인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 주어지지 못한 것만을 갈망하며 목말라 하는 인간의 갈등. 그것을 괴롭더라도 솔직히 인정하는 과정을 다룬 것이 이 만화 '폭풍남아'의 진정한 테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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