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생산적 개헌 논의 시작할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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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19대 국회의원의 86.7%가 개헌에 찬성했다. 본지와 정당학회가 설문조사한 결과다. 정치현장의 중심에 서 있는 정치인,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이 여야 없이 압도적으로 개헌을 원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생산적인 개헌을 얘기할 때가 됐다.

 물론 그간 개헌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과 같은 경우 개헌을 계속 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논의가 국민적 관심을 끌지 못하고 소모적인 차원에 그친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 개헌론이 불순한 정략(政略)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2007년 개헌을 주장했지만 임박한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로 비춰지는 바람에 공감을 얻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도 친이(親李) 한나라당 중진들이 수시로 개헌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부분 박근혜 쪽을 흔드는 정치적 의도를 감춘 것으로 풀이되는 바람에 분란만 일으켰다.

 둘째,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현행 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이다. 현행 헌법은 25년 전 민주화 운동의 결실이다. 이전까지 헌법은 대부분 집권자의 권력욕에 따라 주물러지는 바람에 수명이 평균 5년을 넘지 못했던 기형아다. 반면 현행 헌법은 국민적 자부심과 지지 속에서 태어났으며, 지난 25년간 순탄한 정권교체를 가능케 한 제도적 틀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의 압도적 개헌 지지와 달리 일반 국민들의 개헌 지지는 대개 40~50% 사이에 머물러 왔다. 개헌 필요성에 공감하는 여론이 많기는 했지만 절대적이진 못했다. 대안에 대해서도 ‘무응답’이나 ‘모름’이 많았다. 이 정도 열기론 헌법을 바꾸기 힘들다.

 문제는 그 사이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현행 헌법에 담긴 시대정신은 독재권력의 장기집권에 대한 원천봉쇄다. 그 장치가 바로 대통령 5년 단임제다. 현행 헌법은 그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대신 그 문제점을 반복적으로 드러냈다. 지나친 권력집중과 무책임이다.

 문제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대통령의 형이 만사형통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형의 비서 출신이 공직은 물론 공기업이나 정부 투자기관, 심지어 이미 민영화된 포철과 같은 세계적 기업의 인사에까지 끼어들 수 있었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지나친 권력집중이 주변의 권력남용과 부패를 키우는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무책임은 단임제에서 나온다. 재집권이 불가능하기에 일단 집권하면 독선으로 치닫는다. 정권 초 쇠고기 협상부터 최근 일본과 군사정보교류 협정까지 MB정부가 보여준 밀어붙이기와 거짓말 시리즈는 대표적인 무책임 사례다.

 특히 임기 말 대통령의 무책임은 자신의 지지 세력인 여당과의 갈등으로 비화된다. 이명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유력 대권 후보인 박근혜 의원과의 갈등이 현 시점의 예다. 정권을 마무리해야 할 청와대와 차기 정권을 잡아야 할 집권여당의 계산법은 틀리기 마련이다. 이런 갈등은 국정의 파행과 마비를 불러온다.

 이처럼 헌법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선 헌법을 바꿔야 한다. 그동안 학계는 물론 정치권 내에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있었다. 현재의 문제가 권력집중과 무책임이라면, 이를 개선하기 위한 개헌의 큰 방향은 곧 권력분산과 중임 허용이어야 할 것이다.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이원정부론’이다. 4년 중임제는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줄이고 두 번까지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원정부론은 대통령에게 외교·국방 등 외치(外治)를 맡기고 총리에게 나머지 국정운영의 대부분인 내치(內治)를 맡기는 방식이다.

 개헌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개헌이 어려운 것은 국민적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헌은 나라의 기본 틀이기에 국민 여론을 충분히 수렴해 담아야 한다. 특정 정파의 정략이 끼어들어선 안 된다. 그래야 논의가 소모적인 분열이 아니라 생산적인 국론 형성 과정이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려면 차기 대통령이 임기 초반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부터 논의를 본격화해 차기 대권주자들이 공약으로 내놓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지금이 논의를 시작해야 할 적기(適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