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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배우, 문예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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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1936년 9월, ‘모로코’(1930), ‘푸른 천사’(1930), ‘아메리카의 비극’(1931) 등의 영화를 만든 30년대 미국의 영화감독 스턴버그(Josef Von Sternberg)가 한국을 방문했다. 영화 ‘장화홍련전’(1936)을 보게 된 스턴버그는 ‘주제는 부족함이 많으나 배우가 좋다. 문예봉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경성역에 자신을 환영하러 나온 문예봉을 봤을 때부터 이미 ‘원더풀, 뷰티풀’을 연발했었다. 그는 문예봉을 자신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 디트리히(Marlene Dietrich)와 비교하며 ‘조선의 디트리히’라고 표현했다(‘스탄-벅 인상, 세계적 거장과 조선영화인 좌담회’, 삼천리, 1936.11).

 이 일화의 주인공 문예봉(文藝峰·1917~99)은 1930~40년대 조선의 대표적인 영화배우다. 유랑극단 배우였던 아버지 문수일을 따라다니며 연극 공연을 하다가 16세 때 나운규의 추천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녀는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감독이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흡인력 있는 연기력을 갖춘 배우였다. 한국 최초의 유성영화인 ‘춘향전’(1935)의 주인공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고 그 후 3년 동안 10편의 영화를 연달아 찍을 만큼 그녀의 영화계에서의 입지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빛나는 이력의 스타 문예봉이지만 그녀는 그에 걸맞은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없었다. 문예봉은 1933년 극작가 임선규와 결혼식을 올렸고 34년과 37년에 두 아이를 출산했다. 살림이 곤궁하고 남편이 병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촬영기간 동안에는 촬영장 숙소에서 아이와 함께 숙식을 해결했고 옷도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가 일상이었다.

 한 번은 그녀가 월급을 도난당한 적이 있었다. 기자가 이 이야기를 꺼내자 “시댁에 가려고 어린애 옷도 못 사 주고 양말 뒤꿈치가 뚫어져도 아끼고 하던 돈”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예봉씨가 어린애를 안고 극장에나 거리를 부끄럼 없이 다닌다고 칭찬하는 이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당당하게 답했다. “안 데리고 다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혼자 두고 다닐 수도 없지 않아요?”(‘문예봉 방문기’, 조광, 1936.3)

 문예봉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책임감이 강하고 검소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난이나 아이 엄마로서의 삶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 배우였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