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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총각이 걸친 듯친근하긴 한데왠지 끌리진 않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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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연합뉴스

패션쇼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무대다. 오죽하면 의상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등장하는 말이 ‘웨어러블(wearable)’일까. ‘현실에서’ 착용할 수 있는 옷이란 의미로 통용되는 이 말은, 실상 옷이 입으라고 만든 게 아닐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모델들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주 신체 사이즈를 공개했다고 하여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모델 혜박은 키 1m79㎝에 몸무게가 49㎏이라고 했다. 말라깽이 모델을 퇴출시켜 아름다움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걷어내겠다고 하지만, 현실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1m79㎝와 49㎏의 조합은 패션계에선 말라깽이 축에 들지도 않는다.

지난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13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 돌체 앤 가바나의 런웨이는 허공의 패션계가 아니라 땅에 발을 디딘 현실의 무대였다. 남성 모델은 그냥 비현실이 아니라 판타지의 영역에 있다. 1m85㎝가 넘는 키에 몸무게는 70㎏이 채 안 되는, 그러면서도 적당히 잔 근육 잡힌 남성의 몸이란 건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울 만큼 희귀하니 말이다.

그런데 돌체 앤 가바나의 런웨이에 오른 이들은 ‘진짜’ 남자였다. 늘씬하지도, 매끈하지도 않은 사방천지에서 걸어다니는 평범한 남자들이 무대에 올랐다. 이탈리아 남자는 다 멋지다고 하니까, 어쩌면 이날의 모델들은 이탈리아의 평범 기준에도 못 미칠지 모르겠다.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는 시칠리아를 테마로 이번 컬렉션을 준비했다고 한다. 태양이 작열하는 지중해의 섬을 표현하는 데, 구릿빛 몸통의 남자들이 내뿜는 날것의 매력만 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디자이너 듀오는 프로페셔널 모델 대신 검은 머리에 짙은 피부색을 가진 시칠리아 남자 73명을 선택했다. 마을에서 캐스팅된 이들은 열두 살부터 마흔셋까지, 학생·페인트공·이발사·웨이터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쇼에 앞서 스테파노 가바나는 말했다.
“진짜 사람(real men)에게 우리 옷을 입히고 싶었다. 패션은 그들을 위한 것이니까.”
모델들은 잔뜩 얼어붙어 어정쩡하게, 쫓기는 듯 급해 보였지만 오히려 박제되지 않은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푸근하고, 훈훈하고, 박수쳐 주고 싶기도 했다. 돌체 앤 가바나는 가장 현실적인 무대를 통해 가장 신선한 컬렉션을 선보이는 효과를 거둔 셈이다.
자, 이젠 이런 멋진 말이나 흐뭇한 미소 말고 솔직해져 볼 차례다.

런웨이에는 웨어러블하지 않은 옷들이 종종 등장한다. 너무 독창적이거나 실험적이어서 입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옷이다. 그래도 한번쯤 입어보고 싶거나 아름다워 보인다. 하다못해 궁금증이라도 이는 옷이 등장한다.
그런데 돌체 앤 가바나의 이번 컬렉션은 탐스럽지가 않았다. 다양한 색상 조합의 스트라이프 패턴을 선보인 옷 자체는 셔츠와 반바지, 재킷 등 매우 ‘웨어러블’했다. 그런데도 굳이 입고 싶어질 것 같지 않은 거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늘 맞는 건 아니었다. 실크와 시폰, 리넨 등 좋은 소재로 만든 최고급 디자이너의 옷도 ‘옷거리’가 시원찮으니 동네 아저씨 배바지처럼 보인다. 지극히 현실적인 모델에게 옷을 입힌 건 의미 있는 시도가 됐을지언정 우리가 패션에, 쇼에 기대하는 것을 채워주기엔 부족해 보였다.

역시나 리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진실성(authenticity)’이었다. ‘진실함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A+ 진실성’…. 맞는 말들인데, 어째 개운치가 않다. 미의 판타지를 불어넣던 이들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왜 못 보느냐고 다그치는 것 같달까. 거장이 구현한 진정한 아름다움을 이해 못하다니…. 그냥 가본 적도 없는 시칠리아의 ‘진실성’을 이해 못하는 건 당연하다 생각하는 게 속 편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속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도 못 보는 허황된 사람은 아니라고 위안할 수 있을 테니까.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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