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들쭉날쭉' 여론조사가 민심이라는 한국, 왜?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한국갤럽 사무실에서 조사원들이 여론조사 전화를 돌리고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 한국 사회에선 여론조사 의존도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중앙포토]

한국 정치에서 여론조사 숫자는 권력이다. 대세론을 만들기도, 허물기도 한다.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꾸준한 여론조사 지지율로 여권 제1 강자의 자리를 지키며 대세론을 유지한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민주통합당 주자들을 앞서는 여론조사 지지율로 박 전 위원장의 경쟁자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한국처럼 여론조사가 들쭉날쭉하고 실제 선거 결과와 오차가 나는 곳도 흔치않다. 한국 여론조사의 허실을 살펴본다.

지난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 전재희 후보와 민주통합당 이언주 후보가 맞붙은 경기도 광명을 선거구. 선거를 한 달 남짓 앞둔 3월 7일 한 지방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전재희 후보(41.8%)가 이언주 후보(23.0%)를 20%포인트 가까이 앞섰다. 선거 8일 전인 4월 3일 방송 3사의 마지막 여론조사에서도 전 후보의 승세가 여전했다. 44.5% 대 31.8%로 약 13%포인트 차였다. 하지만 막상 개표 결과에선 이 후보(50.1%)가 전 후보(46.2%)를 앞섰다.

새누리당 후보가 호남 진입에 성공하느냐를 놓고 관심을 모았던 광주 서을 선거구. 이곳 역시 선거에 앞선 3월 27일 지역 일간지와 방송의 공동조사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통합진보당 오병윤 후보를 3.7%포인트 앞섰다. 이 후보가 박빙 우세로 조사된 비슷한 여론조사 결과는 이후 속출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12%포인트 차이를 넘는 오 후보의 넉넉한 승리였다.

4·11 총선에 이어 연말 대선을 앞둔 지금 대한민국은 여론조사 전성시대다. 여야 대선 주자들의 지지율이 매일같이 발표된다. 제1야당에선 대선 후보 예비경선 때 여론조사를 반영해 지지율이 미미한 주자를 컷오프(중간 탈락)시키는 방안까지 나온다. 정치 분야만이 아니다. 수술 거부를 예고한 의사협회가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정부의 포괄수가제를 전격 수용했다. 통합이 확정된 청주시와 청원군의 새 이름 역시 여론조사에 따르기로 했다. 한쪽에선 헛다리 짚는 여론조사가 계속되는데 다른 쪽에선 여론조사가 사회적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는 모순된 현상이 동시에 나타난다. 도대체 한국 정치에선 민심과 다른 여론조사가 왜 나타날까.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왜 이토록 여론조사에 매달리고 있을까.

남의 의견 의식하는 눈치보기 심해
2010년 6·2 서울시장 지방선거. 두 방송사의 여론조사는 한나라당 오세훈 시장이 민주당 한명숙 후보를 적게는 10%포인트, 많게는 20%포인트 앞서며 낙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0.6%포인트 차이에 불과한 오 시장의 진땀 나는 신승이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이런 여론조사를 만드는 원인엔 ‘숨은 표’가 있다. 숨은 표는 ‘침묵의 나선이론’으로 설명되는 ‘은폐형 여론’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다를 때 침묵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강흥수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한명숙 후보 지지자들은 오세훈 시장이 앞선다는 여론 결과를 반복적으로 접하며 자신이 소수파라고 느껴 속마음을 밝히기를 꺼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한국만의 집단주의 문화를 지적한다. 충북대 김주엽(사회심리학) 교수는 “개인을 강조하는 서구 문화에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는 게 미덕이지만 한국에선 남의 의견이 어떤지부터 따져보는 맥락 살피기의 심리가 깊숙하게 작동한다”고 말했다.

‘숨은 표’는 전체적으론 한국의 ‘시선 의식 문화’에 기인하지만, 20∼30대의 젊은 층에선 ‘접촉 불가’라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민주통합당의 선거전략 실무 인사는 “총선 후보자 공천을 위해 여론조사를 할 때 가장 애를 먹는 표본집단이 20대”라며 “20대는 낮에 집에 없으니 유선전화론 제대로 접촉하기 어렵고 밖에서도 휴대전화 여론조사에 잘 응하지 않아 마지막까지 표본 수를 채우기 위해 전화를 돌려야 한다”고 전했다. 여론조사 기관들에 따르면 표본 숫자를 채우지 못한 20대의 표심은 가중치를 부여해 결과를 이끌어낸다. 여론조사의 정확성이 젊은 층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2010년 인천시장 선거가 대표적이다. 당시 각종 여론조사에선 안상수 한나라당 후보가 최대 20%포인트 차이로 송영길 민주당 후보를 앞섰지만 개표에선 오히려 송 후보가 안 후보를 7.4%포인트 차로 제치며 승리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30.8%에 불과했던 20대 투표율이 6·2 지방선거에선 42.3%로 무려 11.5%포인트 상승했다.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가 여론조사의 오판을 불렀다.

우리 사회 여론의 휘발성도 여론조사가 현실과 달라지는 배경 중의 하나다. “한국 여론 형성 구조의 가장 큰 특성은 변심”(강준만 전북대 교수), “한국에선 열광과 환멸의 주기가 지극히 짧다”(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지적처럼 한국 여론은 변화의 주기가 빠르고 진폭도 유난히 크다. 여론조사로 무언가를 예측할 때마다 자꾸 오류가 생기는 이유다. 대선이 있었던 2002년 9월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15%대였다. 30%대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물론 무소속 정몽준 후보에게도 뒤지는 3위였다. 하지만 3개월 후 대선 승자는 노 후보였다.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강세가 계속되지만 야권이 역전을 기대하는 이유는 바로 여론의 변동성에 있다.

이런 사회적 특성에 현장의 부실 조사가 결합되면 여론조사의 정확성은 추락한다. 현재 많은 전문가가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덤핑형 조사’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전화조사를 기준으로 10년 전 조사 단가가 900만~1000만원 정도였다면 지금도 1000만~1300만원 수준으로 큰 차이가 없다”며 “적은 비용으론 정확성을 높일 수 있는 최신 기법이나 방식을 도입하기가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여론조사 단가가 오르지 않은 이유는 여론조사기관이 난립하며 경쟁이 과열됐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조사협회에 등록된 여론조사기관만 42개다. 이런 구조에선 발주처에서 요구하는 낮은 가격과 촉박한 기한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민주주의’ 인식은 독재 상흔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여론조사에 몰두해 그 결과에 열광하고 좌절한다. 지난 4·11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여론조사로 총선 후보를 단일화했는가 하면 지금은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과 안철수 원장 등 유력 주자들의 여론조사 지지율 추이가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다.

여기엔 지난 한국 정치의 어두웠던 그림자가 무의식처럼 작동한다. 강준만 교수는 저서 현대정치의 겉과 속에서 “여론조사 자체가 금기시됐던 독재정권 시절의 상흔이 유권자들의 뇌리에 ‘여론조사=민주주의’라는 등식을 성립시켰다”며 “여론조사는 이른바 ‘보스 정치’를 타파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었다. 여론에 따른 상향식 공천과 의사 결정이 개혁의 보증수표인 양 떠받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선거 여론조사가 본격 도입된 시기는 6·29 선언을 거쳐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모두 출마한 87년 대선 때다. 이전 권위주의 체제에선 돈을 들여 여론조사를 할 필요도, 여론조사에 안심하고 응답할 여지도, 여론조사를 공표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론조사는 군사독재의 권위주의와 차별화되는 아래로부터의 민의의 표출로 간주됐다. 보스 정치 역시 하향식 구조였다는 점에서 여론조사는 민심의 척도로 인정받았다. 지금도 여론조사를 민심으로 내세우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지난 5월 통합진보당에서 비례대표 경선 부정이 불거졌을 때 이석기 당선자가 “당원 총투표로 비례대표 진퇴 여부를 결정하자”고 주장하자 혁신파로 나선 강기갑 전 의원이 “당원 총투표 50%에 국민 여론조사 50%를 반영해 결정하자”고 역제안한 경우가 그렇다.

‘여론조사=민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국 정당 정치의 허약성에 있다. 경희사이버대 안병진(미국학) 교수는 “한국은 정당이나 시민 교육의 역사가 서구에 비해 짧다”며 “정당 활동이 오랜 세월에 걸쳐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당이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그럼에도 민심을 반영해야 하니 여론조사에 의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빈약한 한국 사회의 특성도 여론조사 숫자를 신성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명지대 신율(정치학) 교수는 “한국에선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다 보니 구체적으로 객관적인 수치를 들이대야 겨우 믿는다”며 “신뢰가 부족한 사회에선 수치로 나타나는 여론조사 결과에 더 의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한국 정치에서 여론조사는 현실을 가리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정당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는 수단이라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여론조사는 자칫 현실을 오판하는 흉기가 된다”(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는 비판론과 “대중의 의사를 그나마 가장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수단”(윤희웅 실장)이라는 불가피론이 팽팽하다.

홍상지?강나현 기자 hongsa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