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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영화처럼...홍대 앞 레코드가게의 부활 스토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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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호 19면

1 홍대 문화정보 매거진 ‘스트리트 H’의 일러스트에 그려진 삼거리에 있던 레코드포럼. 2 레코드포럼의 표진영 대표 (왼쪽)와 ‘비닷’의 한승화 대표.

홍대 앞이 ‘문화 특구’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작지만 특색 있는 공간의 역할이 컸다. 레코드포럼도 그중 하나였다. 90년대부터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희귀한 재즈, 월드뮤직 음반을 판매하던 이곳은 음반 가게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음악 장르가 국내에 알려지도록 하는 데 한 축을 맡았다. 수입음반 가격이 비싸 불만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음반 쇼핑을 목적으로 서울에 상경해 100장 넘는 음반을 사 가는 손님들도 있었다는 걸 보면 음악적 다양성에 목마른 이들에게 역할을 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대부분 파일로 음악을 듣는데 음반 가게를 운영해서 수지가 맞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우리는 매니어들의 수요가 꾸준해 별 영향이 없다”는 표진영 대표의 답도 이런 맥락이다.

자본에 밀려 폐점, 한 달 만에 다시 문 연 ‘레코드포럼’

# 시즌1 (1995~2012.5) 홍대 앞 삼거리의 랜드마크
원래 ‘레코드포럼’은 음악잡지였다. 90년대 중반 좋은 음악을 다 같이 듣자고 창간을 했다. 하지만 팝도 가요도 아닌 그가 소개한 음악을 구해 듣기가 만만치 않았다. 표 대표는 내친김에 잡지에 나온 음반을 판매하는 레코드 가게를 열었다. 그게 95년이다. 서교동에서 태어나 홍익 ‘국민학교’를 졸업한 표 대표는 “복덕방·미용실이 있고 할머니가 좌판 깔고 과일을 팔던” 학교 앞길에 자리를 잡았다. 2000년대 초 잡지는 폐간했지만 레코드포럼은 음반가게로 이름을 이어갔다. 그런데 올해 초 표 대표는 건물주로부터 “어쩌면 조만간 건물 매매 계약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언질을 들었다. 다른 가게 자리를 알아봤지만,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오른 홍대 앞 부동산 가격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길가에 10평도 안 되는 가게를 얻는 데 3억~5억원. 표 대표는 “떼돈 버는 사업도 아니고 수억을 들여서 뭐 하나 싶어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5월 초 퇴거 통보가 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굿바이 세일을 열고 재고를 털기 시작했다.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어 적게는 서너 장, 많게는 수십 장씩 음반을 사 갔다. 여기까지는 건물주와 대기업이 자본의 힘으로 동네 가게를 쫓아내는 흔한 얘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표 대표는 건물주가 이런 오해를 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내가 살아있는 동안 여기 있으라고 하셨던 분이에요. 18년 동안 임대료도 거의 올리지 않고 단독주택 한쪽을 임대해주셨고요. 저도 다른 곳에서 입점 제의를 받았지만 건물주와의 약속이 있으니 못 들어간다고도 했었죠. 그런데 부동산은 계속 오르고, 대기업들이 땅을 찾다가 그 자리까지 왔나봐요. 밀어붙이니까 건물주 쪽에서도 혹시 모른다고 말씀을 주셨던 것이고요. 그동안 감사했죠.”

3 지난달 16일 레코드포럼 재오픈에 맞춰 ‘비닷’에서 열린 옥상 공연.

# 시즌2 (2012.6~) 카페 사장이 기증한 새 둥지로
레코드포럼은 이번에도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엔 카페였다. 홍대 인근 카페 골목에 있는 3층짜리 카페 ‘비닷(B.)’ 1층에 ‘숍인숍(shop in shop)처럼 들어섰다. 5평이 조금 넘어 보이는 공간은 세간살이를 미처 채우지 못한 새 집처럼 휑했다. 갑자기 정해진 재오픈에 음반 구매와 배송이 마무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여기에 ‘남녀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사연이 있다. 굿바이 세일 중이던 어느 날 ‘비닷’의 한승화(32) 대표가 레코드포럼을 찾아왔다. 평소에도 음반을 사러 들르곤 했던 그는 이날은 표 대표를 찾아 말을 걸었다.
“(폐점 후) 어디 갈 곳을 정하셨습니까. 아니라면 제가 모시고 싶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젊은이는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레코드포럼을 다시 열자고 했다. 황당한 제안에 어리둥절한 표 대표에게 한 대표는 만들어 놓은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다. ‘갑’은 레코드포럼, ‘을’은 비닷이었다. ‘임대료·보증금·인테리어 등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한다’고 적혀 있는데 좋다고만 하기엔 납득이 안 되는 제안이었다.
“좋아할 일인지 마케팅 차원에서 하는 제안인지, 너무 의아하잖아요. 남녀가 처음 만나자마자 사귀자고 덥석 손잡는 것 같은, 그런 영화적인 상황이었죠.”(표진영 대표)
“제가 원래 팬이었어요. 레코드포럼을 알던 사람이라면 다 알 거예요. 이 공간에서 차를 마시면서 레코드포럼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한승화 대표)

4 새로 문 연 레코드포럼에서 한승화 대표(왼쪽)와 표진영 대표. 5 레코드포럼에선 재즈·월드뮤직 등 다양한 음악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마주 앉아 카페와 레코드가게가 만나 어떤 시너지를 이룰 수 있을지 대화하고는 이튿날 바로 도장을 찍었다.
‘땅 파서 장사하는 건 아닐 텐데’ ‘무상이라는 말을 다 믿어도 되느냐’는 기자의 끝없는 의심에 한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홍대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대기업이 들어오고 프랜차이즈가 진출하는 것도 일종의 다양성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레코드포럼처럼 지역을 이끌어 온 작은 가게가 함께 유지돼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죠.”

이들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홍대 앞에서마저 같은 음악을 듣지는 않아도 된다는 수확은 얻었다.
지난달 17일 영업을 재개한 날엔 조촐한 공연도 열었다. 카페 옥상에서 벌어진 공연 때문에 카페골목의 좁은 길이 사람으로 꽉 들어찼다. 때묻고 낡았던 옛 간판 대신 샛노랗고 매끈한 새 간판을 달고 레코드포럼의 시즌2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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