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AFL 만들어 37년간 이끈 미 노동운동 대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7호 28면

위키피디아

인간은 태초부터 노동하는 동물이다. 노동을 통해 의식주를 해결하고 재화도 창출한다. 초기 노동은 주로 농업분야에서 자급자족 형태로 이뤄졌다. 중세기엔 상공인 중심의 결사체인 길드가 출현했다. 17세기 영국엔 노동조합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우애 조합(Friendly Societies)’이 설립됐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미 노조 선구자 새뮤얼 곰퍼스

18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짧은 기간에 인류사를 바꾸었다. 기술혁신으로 토지와 농업 중심의 전통 경제체제는 무너지고 사회 전반에 걸친 대변혁이 일어났다. 특별한 전문기술이 없는 노동자도 산업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근로자와 자본가 사이에 갈등도 나타났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근대 노동운동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초기 노동운동은 순탄치 못했다. 일부 유럽 국가는 노조결성 자체를 금지했다. 그래도 노동자의 권리투쟁은 계속됐다. 1890년 무렵 유럽 각국엔 이념 성향 또는 직능별 등 여러 형태의 노조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 5월 1일 파리서 국제노동자총회가 열렸고 이날은 이후 만국 노동절이 됐다.

런던의 유대인 빈민가 출신으로 美 이주
1869년 미국 최초의 노조인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이 결성됐다. 1886년 12월엔 오늘날 미국 노동운동의 본산이 된 미국 노동총동맹(AFL·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이 발족됐다. AFL 탄생의 주역은 새뮤얼 곰퍼스(사진)란 유대인 시가 제조업자였다. 그는 1850년 런던의 유대인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네덜란드 태생의 유대인이다. 가정 사정으로 학업은 초등교육만 마치고 유대인 야학을 다녔다. 히브리어와 탈무드를 배웠다.

1863년 그의 가족은 뉴욕 맨해튼 로어 이스트사이드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가내 수공업 형태로 시가를 제조했고 소년 곰퍼스는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이후 그는 연초 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을 배웠다. 그는 먼지와 연초가루 속에서 노동자들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물론 그도 천식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단체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몇몇 동지들과 힘을 합쳐 1886년 12월 AFL을 창립했다. 당시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매우 열악했다.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 노동했다. 임금 책정에 관한 법적 장치도 없었다. 예고 없이 노동자를 해고했다. 모두가 사용자 마음대로였다.

1890년대가 되자 공황 위기가 찾아왔다. 단순직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되고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온 값싼 노동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AFL을 중심으로 외국 노동자의 무차별적 이민을 막는 데 주력했다. 그는 특히 중국 노동자의 미국 이민을 적극 반대했다. 이들이 노동시장에 진출하면 미국 노동자의 평균 임금이 하락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랫동안 물리력을 동원해 노동자를 탄압하고 노동력을 착취한 이른바 ‘스웻숍’(sweatshop·악덕자본가)과도 맞섰다.

대표적 인물은 독과점 자본으로 부를 축적한 록펠러가와 노조 설립을 방해한 자동차 왕 헨리 포드다. 포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이며 반유대주의자다. 곰퍼스는 사업상 고급 시가의 본고장인 쿠바와도 관계가 깊었다. 쿠바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곰퍼스는 미국의 개입을 촉구했다. 결국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곰퍼스는 사회주의자·반제국주의자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노조를 운영하면서 점차 보수 노선으로 선회했다. 그는 정치·사회적 요구나 계급투쟁의 수용보다 미국 노동자들이 의식주 걱정 없이 자녀를 교육하는 ‘안락한 삶’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표를 뒀다. 그는 “파업이 없는 나라는 자유국가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전시엔 군수물자 생산을 저해하는 파업을 막았다. 그리고 장기적 노사분쟁이 선량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협조적인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야말로 상생의 길을 걸었다. 이런 그의 행동은 ‘기회주의자’ 또는 ‘귀족 노동운동가’란 비난을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다수 미국 노동자의 신임을 얻어 무려 37년이나 AFL 회장직을 유지했다.

곰퍼스는 1924년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출장 중 지병인 천식과 당뇨, 신장염의 악화와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선구자적 노동운동 정신은 시드니 힐먼과 벤 골드 등 후배 유대인 노조지도자에 의해 계승, 발전됐다. 1955년 AFL은 산업노조 CIO와 통합돼 AFL-CIO로 재출범했다.

“파업 없는 나라는 자유국가 아니다” 주장
곰퍼스는 노동운동을 노사 간 공생과 상생의 길로 이끌었다. 1930년 미국 대공황이 일어나자 극렬 좌익세력이 미국 노조를 일시 장악했다. 당시엔 미국 노동운동이 한동안 극한투쟁 일변도로 양상이 돌변했다. 그러나 2차대전 발발을 계기로 다시 온건노선으로 돌아왔다. 결국 곰퍼스의 노동운동 기조는 오늘날까지 유지돼 미국은 유럽과 같은 만성적 노동쟁의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리고 안정된 산업활동 환경 속에서 풍요와 번영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미국 유대인은 철강, 자동차, 무기 산업 등 대단위 산업시설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미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면 큰 오산이다. 반대로 그들은 그들만의 절묘한 체제와 고유한 방식으로 미국 경제의 중추부를 휘어잡고 있다. 이른바 유대인의 3대 경제 축인 금융, 노조와 유통망이다. 이 세 가지만 장악하면 구태여 거대한 자본을 투입한 대형 산업시설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 오랜 기간 고난과 박해 속에서 터득한 유대인만의 탈무드적 지혜의 한 단면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