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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9. 브로드웨이

중앙일보

입력

1999년부터 'Cookin'(요리) 이란 이름으로 유럽 순회공연을 시작한 '난타'는 올해에도 유럽·아시아 각국을 돌며 공연하게 된다.

특히 9월에는 보스톤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을 돌며 무려 34주간 55개 도시를 방문하는 대장정이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내년,대망의 브로드웨이 진출을 위한 전초전이다.

이를 위해 뉴욕에 PMC 엔터테인먼트 USA를 설립했고,국내공연사상 최고액을 받고 뉴욕 브로드웨이의 3대 메이저 뮤지컬 제작사인 리처드 플랭클린 컴퍼니를 미국 투어의 매니저로 계약했다.

전세계 예술의 메카인 브로드웨이.그 곳에서 '난타'의 장기공연이 이뤄진다면 나는 지금까지 가슴에 품은 꿈 하나를 이루게 된다.길고 긴 세월 동안 기다려왔던 소망….

누구에게나 나그네가 긴 여로의 끝에서 지친 발걸음으로 찾아가는 고향집 같은 공간이 있을 것이다. 버선발로 달려나온 어머니가 반기며 부르는 이름, 그 한마디에 온갖 피로를 한순간에 잊고 또 다시 삶에 용기를 충전하듯 내게도 쌓인 피로를 잊고 가없는 힘을 얻는 곳이 있다. 바로 뉴욕이다.

그러나 그곳은 무엇을 하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다. 그저 지친 일상으로부터 쉬려고 가는 곳이고,가는 것만으로도 활력을 되찾는 곳이다.

뉴욕은 내게 그냥 뉴욕이 아니다.85년부터 88년까지 네해 동안의 뉴욕생활이 없었다면 과연 '난타'를 제작할 수 있었을까? 95년 의욕적으로 제작한 뮤지컬 '고래사냥'이 흥행엔 성공했지만 내 자신의 기대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얻은 뒤 창작 뮤지컬이 가야 하는 멀고 험난한 길에 절망하고, 또 국내 시장규모의 한계를 탓하며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다시 찾아가 힘을 얻은 곳이 뉴욕이었다.

다양한 인종의 어우러짐과 아이디어 번뜩이는 다양한 작품들과 만나면서 그 분주함 속에서 힘을 얻고 돌아오는 곳,그 곳이 내가 보고 느낀 뉴욕이다.내가 접했던 다양한 문화체험은 '난타'의 바탕이 됐고,세계시장에서 우리 공연상품의 수출이라는 남다른 꿈도 이룰 수 있게 됐다.

85년 당시,난 극심한 문화적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수입되던 외화도 연간 겨우 십여편을 꼽던 시절.브로드웨이 뮤지컬 얘긴 연극배우들끼리 늘상 나누는 소재지만 국내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해 이십여년을 이어온 연기 생활이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자책감도 들었고,뭔가 변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때 무작정 용기를 내서 짐을 꾸려 찾아간 곳이 뉴욕이었다.

수중에 돈은 없었다.반드시 뉴욕에 가서 뭘 하겠다는 각오도 특별히 없었다.그저 그동안 해오던 일을 훌훌 털고 3∼4년 마음공부하면서 세상구경해보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뉴욕.하루하루가 충격의 나날이었다.끝간 데 없는 창작자들의 상상력,하루에도 수십편씩 오르는 다양한 형식의 공연,충격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작업에서부터 엄청난 자본이 투여된 상업연극이 뉴욕이란 공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 시절 봤던 수백편의 공연 가운데 피터 슈만이 이끄는 극단 '빵과 인형'의 연극을 잊을 수 없다.뉴욕 인근의 시골마을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단원들은 일년에 한두 차례 뉴욕으로 나와 공연한다.

학교 강당 같은 작은 시설에서 그들의 인형극을 선보인 뒤,손수 농사 지은 밀가루로 만든 빵을 객석에 나누어준다.그래서 극단이름도 '빵과 인형'이라 했다.

그 시금털털한 빵맛만큼 정성스레 공연한 연극도 잊을 수 없다.브루쿨린 아카데미 뮤직홀에서 열리는 '넥스트 웨이브 페스티벌'에서 만난 장장 9시간짜리 공연 '마하 바라타'가 그 중 하나.영국의 연출가 피터 부룩이 인도의 대서사시를 공연화한 실험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 만만치 않은 공연제작비를 필립 모리스 같은 담배회사들이 적극 지원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기업과 문화의 대표적인 만남을 그곳에서 보았던 것이다.

'캐츠''레 미제라블''미스 사이공' 등 십년이 넘도록 한 극장에서 장기 공연중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부터 전배우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전라 출연해 이목을 집중시켰던 뮤지컬 '오! 캘커타'까지,가슴이 차오르는 충만감에 빠질 수 있었다.

미국 뉴욕주 뉴욕시,그 중에서도 하늘을 찌를듯한 빌딩이 숲을 이룬 맨허튼.브로드웨이는 바둑판처럼 정렬된 맨하튼의 한복판에서 북에서 남으로 삐딱하게 굽은 길이름이다.그 길의 35번가에서 55번가까지 대규모 극장가를 이루고 있다.42번가를 중심으로 2백여편의 작품이 공연되는 브로드웨이의 관객은 늘상 90%가 관광객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브로드웨이의 상업성을 비판하며 '오프 브로드웨이'가 생겨났고,또 다시 변질된 오프 브로드웨이를 지양하며 더 실험적인 작업들이 선보이는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가 뉴욕에 있다.

초기에는 구분이 명확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최근에는 1천석 이상의 객석,두시간이 넘는 장막극이 공연되는 브로드웨이와 차별화한 5백석 미만,1시간 남짓의 공연이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여전히 실험성이 돋보이는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는 뉴욕의 아래쪽 '그리니치 빌리지' 지역이다.갤러리가 많은 소호와 인접해 있는 작은 공연장에선 매일 저녁 헤아릴 수 없는 공연이 올려진다.창고 같은 극장이 있나 하면 40-50석의 객석을 가진 소극장도 있고,심지어 개인 아파트 거실에서 가족이 공연을 올리기도 한다.관객들은 거실 구석구석에 쿠션에 기대 한 가족이 만든 연극 한편을 본다.

경제적으론 넉넉지 않은 뉴욕 생활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도 풍요로워 감당하기 힘들었다.때때로 이빨 빠진 접시에 음식을 집어던지듯 내오는 불친절한 챠이나타운에서 최고의 중국요리를 만끽하고, 길 건너 '리틀 이탈리아'로 불리는 이탈리아 타운의 노천 까페에서 카푸치노 한잔을 마시면서 하루 저녁 사이에 중국과 이탈리아를 동시에 만끽하는 진미도 뉴욕이기에 가능했다.

주말이면 뉴욕커들은 너나없이 여행을 떠난다.대신 번화가는 관광객이 메운다.나는 뉴욕에서 김밥과 오이장아찌를 싸들고 센트럴 파크를 찾아갔다.잔디밭에 누워 책 읽고 음악 듣고 낮잠 자던 그 주옥 같은 시간이 가난한 유학생에겐 최상의 행복이었다.

어려서부터 정해진 스케쥴 따라 방송국을 오가야했던 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행복하던 시절이 그 때였던 것 같다.

이제 공연관련 일을 하는 젊은 후배들에게 뉴욕 여행을 추천한다.돈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한달도 좋고 일주일도 좋다.일년이면 더 좋다.수많은 인종과 수많은 문화가 살아있는 이 매력의 도시에선 끊임없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싼 물건과 가장 비싼 물건이 함께 있는 도시, 최하류의 문화와 최상류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 엄청난 자본을 들인 상업연극과 그 1%도 안되는 제작비의 실험극들이 나란히 무대에 오르는 곳. 갱과 경찰,월가의 사람들과 노숙자들, 예술가와 예술을 꿈꾸는 지망생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땅.그래서 뉴욕을 천일야화의 도시라고 하던가.

전세계 문화가 집결해 뜨거운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는 그곳에서 난 획일적이고 편협한 사고에 길들여진 기존의 관념을 깰 수 있었다. 다양함이 공존하고 색다름이 인정되는 뉴욕의 개성과 자유를 무엇보다 나는 사랑한다.

내가 만든 우리의 문화상품을 당당하게 들고 뉴욕 브로드웨이로 입성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의 가슴은 벅차다.

송승환(배우 ·PMC 대표 ·'난타'제작자)

<송승환 약력>
▶1957년 서울 출생.
▶64년 KBS 아역성우로 데뷔.
▶68년 동아연극상 특별상 수상.
▶76년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 중퇴.
▶82년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수상.
▶94년 서울연극제 남자연기상 수상.
▶97년 PMC프로덕션 대표.'난타'제작.
▶98년 동아연극상 작품상,한국뮤지컬대상 특별상 수상.
▶출연작:'아줌마''포옹''행복한 아침''연어가 돌아올 때''목욕탕집 남자들''분노의 왕국'(이상 드라마) ,'에쿠우스''일어나라 앨버트''로미오와 줄리엣''사의 찬미''너에게 나를 보낸다'(이상 연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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