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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實회계 공화국… 3개社중 1개꼴‘化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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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不實회계 공화국-. 벤처부터 대기업까지 회계장부가 온통 조작투성이다. 특히 한국 경제에 치명상을 입힌 기업들은 한결같이 ‘화장’에 ‘가면’까지 쓰고 부실을 감춰왔다. IMF 관리체제의 단초가 된 기아부터 지금껏 골칫덩이로 남아 있는 대우까지 모두 똑같았다. 분식에 따른 허상이 남긴 파장이 생각보다 커지자 정부는 허둥지둥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미 선진국 수준이란 평가를 받는 법과 제도를 또 뜯어 고친다며 야단이다. 제도가 아니라 실천이 문제라는 지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집자>

지난 1999년 D종금은 장부를 조작해 1백61억원의 손실을 2백50억원의 이익으로 바꿨다. 역외펀드의 외화 대출금에서 손실이 났지만 부실 외화채권을 장부가로 평가해 정상 외화채권인 것처럼 꾸미는 수법으로 이익을 터무니없이 부풀렸다.

중견 S건설도 지난 1997년 소송 제기 중인 도급공사 계약 비용 가운데 일부인 1백54억7천8백만원을 공사 수익으로 잡았다. 장부 기록은 당연히 달라졌다. 1백5억원의 손실이 49억원의 이익으로 뒤바뀌었다.

금융감독원이 나중에 무혐의 판정을 내렸지만 벤처기업인 Y반도체도 장부를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Y사는 지난 1998년 12월 갖고 있던 S사 회사채를 당시 대주주인 S기술투자에 34억원이나 비싸게 팔아 세전 순이익을 플러스로 돌렸다는 의혹을 샀다.

부실회계 공화국-. 벤처기업부터 금융기관까지 회계장부는 조작투성이다. ‘벤처 정신’이고 ‘신용 제일’이고 온데간데없다. 1년 장사 내역을 고스란히 적는 기업이 드물다. 이리저리 덧칠을 해서 그럴싸하게 꾸민다. 이른바 ‘분식(粉飾)회계’ 또는 ‘분식결산’(용어해설 참고)이다.

물론 대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망한 대기업은 더 심했다. 기아·대우·동아그룹이 그랬다. 회계법인과 감독당국, 은행을 감쪽같이 속였다. 금액도 천문학적이다. 기아는 1991년부터 7년간 4조5천억원의 손실을 꼭꼭 숨겼다. 대우의 분식 규모는 41조9백억원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청산가치가 존속가치보다 큰 것으로 드러나 파산위기에 몰린 동아건설은 지난 2월9일 10년간 7천억원대를 부풀렸다고 자진 신고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던 이들 기업은 결국 ‘적자 - 분식 - 빚 - 적자…’의 악순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분식결산으로 치장한 허상(虛像)은 쉽게 벗겨질 가면일 뿐이었다. 이익을 내도 어려운 판에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할 방법은 없었다.

영화회계법인의 실사를 받고 있는 현대건설은 분식회계 청산의 시험대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대건설측은 이번 실사가 신뢰 회복의 계기가 될 걸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번 실사가 ‘출자전환 명분용’이란 관측 속에 현대건설이 대우처럼 이중 장부를 작성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어 ‘제2의 대우’파문 가능성도 있다.

벤처부터 대기업까지 분식 일색

이런 가운데 지난 2월19일부터 영화회계법인의 실사를 받고 있는 현대건설은 분식회계 청산의 시험대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대건설측은 이번 실사가 세계적 경영컨설팅 기관인 ADL의 경영 진단과 패키지로 이뤄지는 만큼 신뢰 회복의 계기가 될 걸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번 실사가 ‘출자전환 명분용’이란 관측 속에 ‘제2의 대우’파문 가능성도 제기 되고 있다. 현대건설이 대우처럼 이중 장부를 작성했다는 의혹이다. 해외 공사와 관련 이중 장부를 만들어 대북 사업에 투자했다는 루머가 돌고 있는 것. 길게는 석달 정도 걸릴 이번 실사 결과에 따라 회계법인과 현대 둘 중 하나는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분(粉)으로 화장을 하는 식의 ‘분식회계’는 왜 하나. 사실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자 입장에선 분식한 회계장부만으론 회사를 끌고 나갈 수 없다. 실상은 어느 누구보다 본인들이 더 잘 안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대외용이다. 예컨대 은행대출을 위해서다. 남의 돈이 필요한데 제대로 된 회계장부론 남의 돈 빌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장부를 꾸민다. 못생긴 얼굴로는 도저히 시선을 끌 수 없어 덕지덕지 화장을 하고 나가는 여자나 마찬가지다.

이처럼 회계장부를 꾸미는 비뚤어진 관행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월7일 금융감독원은 지난 11년간 국내 기업 3개 가운데 1개꼴로 회계장부를 멋대로 조작했다고 밝혔다.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 금융기관이 제 몫을 못한 탓이 크다는 지적이다. 관치금융에 끌려다니던 금융기관은 제대로 챙기지도 않으면서 그럴듯한 감사 보고서를 요구했고 돈이 궁한 기업으로선 조작도 마다하지 않았다. 세금만 조금 더 내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증자나 회사채 발행 때도 분식은 단골 코스였다. 기업이 ‘의견거절’ 또는 ‘부적정’(용어해설 참고) 판정을 받으면 당장 무보증 회사채를 발행할 수 없다. 더군다나 2년 연속 이런 의견을 받으면 상장 또는 등록이 취소될 수도 있다. 회계법인과는 ‘갑과 을’의 관계인 기업이 이런 수모를 당할 까닭이 없다. 수임과 감사보수를 미끼로 회계법인을 쥐고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1백6개 기업의 1998 회계연도 감사 보고서를 감리한 결과 65.1%인 69개사가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경기가 나빠 돈이 필요한 때일수록 분식이 성행한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이 무렵엔 기업·금융 부문 모두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낯선 잣대가 위세를 떨칠 때라 이를 맞추려고 분식기법에 기대는 부작용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분식회계와 부실감사를 적발하는 감독당국의 감리기능은 오히려 약화됐다. 금감원의 감리인력은 지난 1997년 1개국 26명으로, 지난해 말에는 12명으로 줄어든 데 이어 얼마 전에도 3명이 또 줄었다.

안에서 곪을 대로 곪으면 결국 밖으로 덧나기 마련이다.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동아건설 분식건이 화력을 더했다. 지난 2월6일엔 급기야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 “분식회계 근절”을 외쳤다. 그러자 재경부와 금감위도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여당인 민주당 쪽에서도 한 수 거들고 있다. 외부감사법과 공인회계사법 개정안이 2월말 국회를 통과할 예정이다. 법무부는 증권집단소송제를 담을 특별법을 검토 중이다. 금융거래 때 불이익을 주고 상법을 고쳐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도 마련 중이다.

회계법인 쪽에서도 분식회계에 ‘강수’로 대응하는 모습이다. 대우 유탄에 청운·산동회계법인이 문을 닫은 데다 회계사가 형사처벌은 물론 민사소송에 걸릴 가능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회계업계 빅5로 불리는 삼일·안진·안건·영화·삼정은 부실 위험이 있는 기업의 감사는 아예 거절하거나 신용등급이 좋은 기업만 감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더군다나 회계사들은 기업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의견거절’이나 ‘부적정’의견도 불사할 태세다. 김영식 삼일회계법인 전무는 “자동차·건설을 비롯 이른바 요주의 업종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좀더 신경을 쓰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당장 회계법인과 12월 결산법인이 물밑에서 밀고 당기기가 치열해 이른바 ‘회계대란’설까지 돌고 있다. 대개 3%를 밑돌던 ‘의견거절’이나 ‘부적정’ 의견이 무더기로 나올 경우 부실 기업들이 잇따라 문을 닫게 되고 그에 따라 자금시장이 출렁댈 것이란 내용이다. 정확한 집계는 4월 중순께 나오겠지만 올해는 이런 판정 비율이 5∼10%에 이를 전망이다.

증권검사 1국 검사역으로 사실상 좌천된 유재규 前 금감원 회계제도실장이 ‘면죄부’ 발언을 한 것도 이런 회계대란을 피해보자는 뜻이었다. 유 前 실장은 “전년도 오류수정 손실(용어해설 참고)로 분식에 따른 부실을 2∼3년 안에 모두 털어내면 행정·사법처벌을 면제해주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대통령 긴급명령 나와도 문제 남아

다만 이 경우에도 세금 문제나 민사 소송 문제까지 해결되진 않는다. 또 분식회계와 부실감사로 이미 처벌을 받은 기업이나 회계법인과의 형평성 문제도 남는다.

반면 회계대란이 일어나면 당장은 충격이 있겠지만 길게 보면 그게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있다. 최진영 금감원 회계제도실장은 “깐깐한 감사로 망할 기업은 망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적자 결산을 하더라도 부실을 깨끗이 털어내려는 기업도 많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 긴급명령 같은 극약처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민사 소송 문제는 여전히 남지만 일단 아픈 ‘과거사’를 한 번 매듭짓고 갈 수 있지 않느냐는 계산이다.

이런저런 논의를 떠나 기존 룰만 잘 지켜도 분식회계 걱정은 없다는 시각도 있다. 김일섭 한국회계연구원장은 “제도는 지금도 잘 갖춰져 있지만 지키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라며 “다만 2년 전 동양종금이 한국강관 부실을 문제 삼아 소송을 냈던 것처럼 기관 투자자들이 적극 나설 필요는 있다”고 밝혔다. 분식회계 논란은 회계기준이 달라 생긴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시킨 해프닝이라는 반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용어해설]

■ 분식회계란

분식회계란 기업이 회사의 실적을 좋게 보이려고 거짓으로 자산이나 이익 등을 크게 부풀려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것을 일컫는다. 허위 매출 계상, 자산 과대 평가, 비용과 부채 과소 계상 등의 수법으로 결산 재무제표상의 수치를 고의로 왜곡시키는 것으로 분식결산이라고도 한다.

분식결산은 특히 불황기에 회사의 신용도를 높여 주가를 유지시키고 자금조달을 손쉽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면 주주나 하도급업체, 채권자 등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분식결산은 회사의 재무상태가 거짓으로 꾸며지기 때문에 투자자나 채권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어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분식결산을 막기 위해 회사는 감사를 둬야 하고 외부 감사인인 공인회계사로부터 회계감사를 받도록 돼 있다. 또 회계감사 보고서를 금융감독원이 다시 한번 조사해 분식결산 여부를 밝혀내는 ‘감리’라는 장치도 두고 있다.

분식결산을 제대로 적발하지 못한 회계법인은 영업정지나 설립인가 취소 결정을 받을 수 있다. 투자자나 채권자가 분식결산 된 재무제표를 보고 투자한 뒤 손해를 본 경우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할 수 있다.

■ 전기오류수정이란

전년도 회계처리상 실수 또는 분식회계 등으로 잘못된 재무제표상의 수치를 손익계산서 수정을 거쳐 대차대조표상의 전기이월 이익잉여금 규모를 고치는 회계처리 작업이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동아건설의 경우 외부감사인인 안건회계법인이 지난 98회계연도 재무제표에 당시 시점까지 과대 계상된 이익 7천1백40억원을 손익수정손실로 처리, 분식을 털어냈었다.

■ 회계사의 4가지 감사의견이란

자산 총액이 70억원 이상인 주식회사는 반드시 회계법인으로부터 1년에 한 번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한다. 회계법인은 기업이 작성하는 결산보고서를 감사한 뒤 감사보고서 상에 적정, 한정, 부적정, 의견거절 등 4가지 의견을 표시한다.

적정= 범위에 제한을 받지 않고 감사를 한 결과 기업의 재무제표가 기업회계기준에 따라 적정하게 작성돼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이는 재무제표가 회계기준에 따라 작성됐다는 뜻이지 기업의 경영상태가 좋다는 말은 아니다.

한정= 기업회계 준칙에 따르지 않은 몇 가지 사항이 있지만 그것이 재무제표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우 한정 의견을 낸다.

부적정= 기업의 결산보고서가 회계기준에 위배, 기업 경영 상태가 전체적으로 왜곡됐다고 판단한 경우 낸다. 기업회계가 완전 엉터리라는 얘기로 부적정 의견은 기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

의견거절=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없거나 감사인이 독립적인 감사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낸다.

■ 분식회계 주요 수법

분식회계 수법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창고에 쌓여 있는 기말재고를 과다 계상하는 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 실제 재고는 1백억원어치인데 장부상에는 5백억원으로 적는다. 이렇게 하면 매출원가가 줄어들어 그만큼 순이익이 올라간다.

두번째는 실제 팔지 않았으면서 허위로 거래처의 매출전표를 끊어 매출채권을 부풀리는 방법이다. 대우그룹을 감사했던 한 회계사는 “매출채권이 의심스러워 거래처에 매출확인서를 요청했더니 대우직원이 확인서까지 위조했다”고 전했다.

세번째는 매출채권의 대손충당금을 적게 쌓아 이익을 늘리는 방법이다. 거래처가 부도났거나 장기간 받지 못한 매출채권은 실제 회수가능 금액을 기준으로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하는데도 세법상 매출채권의 1%만 비용으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추가로 충당금을 쌓지 않는 것.

또 요즘 들어선 수법이 지능화 돼 외국 금융기관을 끼고 역외펀드를 만들어 파생상품을 활용하고 있어 회계법인들이 쉽게 적발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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