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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대선 주자들의 ‘기괴한’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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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아주 이례적이다(extraordinary).”

 18일 멕시코 로스카보스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다. 요즘 ‘잘나가는’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콜롬비아도 국제통화기금(IMF)에 출연하겠다고 약속한 걸 두고서다.

 남아공이 20억 달러, 콜롬비아가 15억 달러였다. 우리나라가 내놓겠다고 약속한 150억 달러와 비교하면 ‘푼돈’처럼 보일 게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처지를 감안하면 쉽사리 그런 말을 못한다. 남아공은 경제 규모가 우리의 3분의 1이다. 유로존 위기의 직격탄을 맞았고 최근 신용등급 전망도 내려갔다. 콜롬비아는 성장세라곤 하나 남아공에도 못 미치는 규모의 나라다. 이들 나라만이 아니다. 지중해의 섬나라 키프로스와 말타도 600만, 300만 달러를 내기로 했다.

 이런 약속들이 모여 IMF 긴급구제 재원이 4560억 달러 이상 늘어난다. 기존 대출 능력의 두 배 가까운 액수다. 그만큼 방화벽이 두터워진 셈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불참 탓에 맥 빠졌다는 중평 속에서도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가 “크고 작은 국가들이 우리의 요구에 호응했다. 다자 간 공동정책을 위해 보여준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건 그런 연유에서일 거다.

 메시지는 뚜렷하다. 이들 나라까지 나설 정도로 엄중한 시기란 거다. 유로존의 위기가 곧 글로벌 위기일 수 있다는 거다. 그리스나 스페인·이탈리아의 문제가 언제든, 어디로든 번져갈 수 있다는 의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리스 선거에서 ‘우리는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말하는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버젓이 내정 간섭성 발언을 하고, 기획재정부 관료들이 “우리나라 총선 때엔 밤을 안 샜는데 그리스 총선 때엔 새야 했다”고 토로하며 이명박 대통령이 로스카보스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그리스 총선 속보를 챙겨야 하는 세상이 된 거다. 프랑스와 그리스 선거에서 확인됐듯 시끌벅적한 가운데 국가지도자도 갈린다. 정치와 경제가 함께 가는 세상인 거다.

 대한민국 정치권은 그러나 기괴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하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인데도 경제와 유리돼 있다. 상반기에 경기가 저조하고 하반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의미로 ‘상저하저(上低下低)’라는 말까지 나오는데도 행정부에만 맡겨두고 있다. 드물게 ‘유로존 위기’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정치인이 있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 “국회를 개원해야 한다”거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너무 일찍 맺었다”는 식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논거로 사용할 뿐이다.

 여느 정치인이라면 그래도 타박하긴 어렵다. 여느 정치인이니까. 하지만 대선 주자는 달라야 한다. 유로존 위기는 몇 년 갈 난제다. 이 대통령의 임기는 내년 2월 24일까지다. 다음 대통령, 즉 대선 주자 중 한 명이 위기 극복을 지휘할 당사자란 뜻이다. 대선 주자들이 각자의 입장을 내놓고 국민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대선을 불과 6개월여 남겨둔 지금도 ‘깜깜속’이다. 대선 주자들도 사실상 아무 말도 안 해서다. 대선 주자들이 근래 한 얘기라곤 국내 문제, 그중에서도 ‘선거공학’류가 압도적이었다. 새누리당에선 오픈프라이머리 도입 여부를 둘러싼 경선룰 다툼 소리만 컸다. 급기야 유신(維新)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야당에선 안철수 서울대 교수에게 대선 참여 여부를 밝히라고 채근하는 목소리만 울렸다.

 대선 주자들의 이런 모습이, 겉으론 이 대통령을 비난해도 속으론 남은 8개월 임기 동안 위기를 극복할 것이라고 신뢰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재정을 악화시키면서 성장을 하면 잠시는 성장할 수 있으나 2~3년 후 또다시 위기가 닥치게 된다”는 이 대통령의 신조에 동의해서인가 궁금하다. 혹 기재부 관료들이 알아서 잘할 것이라고 믿어서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바깥 세상엔 도통 관심이 없는 내향적 사고 때문인가, 정녕 아무 생각이 없어서인가. 로스카보스에서 내내 든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