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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길 걷다보니 여기저기 고려청자 파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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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산책길이자 등산로로 유명한 서울 강북구 수유동 일대의 북한산 둘레길 2구간이 ‘도자기 역사학습장’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인근에서 발견된 ‘고려 청자 가마터’ 5곳 때문이다. 이곳은 현재까지 확인된 서울 지역의 유일한 청자(靑瓷) 가마터다.

 지난 15일 오후 이준 열사 묘역 옆으로 조성된 등산로에 도자기 파편들이 햇빛에 반사돼 반짝이고 있었다. 등산로 옆 언덕에서도 흙더미 속에 묻힌 도자기 조각 일부가 눈에 띄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도자기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청자 가마터 20개가 있는 강북구 수유·우이동 일대의 북한산 둘레길. 이곳에서는 땅속에 묻혀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습을 드러낸 고려 말, 조선 초의 청자 조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작은 사진은 지난해 8월 발굴한 이준 열사 묘역 옆 가마터. 도자기 600여 점이 출토됐다. [최종혁 기자], [사진 강북구]

등산객 전민식(42)씨는 등산로 곳곳에 뒹구는 도자기 파편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그는 “수십 번도 더 다닌 길인데 이곳에 청자 가마터가 있었는지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에는 ‘수유동 가마터 3호’에서 수백 점의 도자기가 출토된 바 있다.

 북한산 자락에 이처럼 가마터가 많은 이유는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역사박물관 조치욱 학예연구사는 “고려 말인 1370년대부터 40여 년 동안 왜구의 침략으로 전남에 있던 청자 제작소가 해체됐다”며 “서해를 통한 운송마저 힘들자 도공 일부가 아예 도성 근처로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질자원환경연구원에 따르면 강북구 일대의 북한산에는 15곳의 가마터가 더 있다. 우이동 소귀천 계곡 8곳, 그린파크텔 3곳, 우이령 계곡 4곳 등이다.

 도자기를 굽기에 적합한 북한산의 자연조건도 한몫했다.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흙·나무가 필수인데 수유동 가마터 바로 옆에는 구천계곡이 있다. 참나무·소나무 등 땔감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곳 뿐만 아니라 북한산 내 가마터 20여 곳 모두 인근에 계곡을 끼고 있다. 조 연구사는 “고령토를 사용해야 하는 백자와 달리 청자는 일반 흙을 정제해서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조선 시대 한양 인근이었던 수유동에서 생산된 도자기들이 사대문 안으로 공급됐다고 보고 있다. 윤용이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수유동 가마터에서 발굴된 도자기들과 2010년 종로구 청진동 재개발지역에서 발굴된 도자기가 동일하다”고 말했다.

 가마터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와 불량품을 처리하는 폐기장을 일컫는다. 수유동 가마터 발굴 당시 도자기가 출토된 곳은 대부분 폐기장이었기 때문에 온전한 상태의 유물은 없다. 지난해 발굴한 가마터는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흙으로 덮고 잔디를 심어 놓았다.

 강북구청은 앞으로 가마터 주변을 복원해 등산객들이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를 구축해 가마터를 복원하고 근·현대사기념관, 자연학습장을 조성하겠다”며 “북한산 둘레길을 찾는 또 다른 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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