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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를 다지자] 46. 불량 계측장비

중앙일보

입력

판유리 가공기를 만드는 우리 회사에서는 1천분의 1㎜까지 측정해야 할 경우가 많다. 가장 간단한 눈금자를 비롯해 버니어 캘리퍼스.마이크로 미터.블록 게이지.다이얼 게이지 등 정밀 측정장비를 많이 쓴다. 모두 50가지가 넘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운데 국산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과거 몇몇 국산제품을 써봤지만 품질이 나빠 다시 일제로 바꿨다. 국산은 반년도 안돼 변형되면서 1~2㎜의 오차가 나고 가장자리가 날카로워지는 바람에 손을 베는 일도 있었다. 1천분의 1㎜를 다루는 현장에서 몇 ㎜의 오차는 머리카락을 동아줄로 바꿔 맨 것이나 마찬가지다.

계측기기는 산업현장의 눈과 귀다. 눈.귀가 잘못되면 사고가 나기 쉽듯 설계나 가공에서 한치의 오차는 품질불량.사고로 연결된다. 때문에 계측기기의 정확성은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분야의 하나다. '생산활동의 약속' 이라 할 수 있는 길이.무게.온도.압력.시간 등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품질이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문방구에서 파는 플라스틱 자도 눈금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간단한 눈금자 하나도 제대로 못만들면서 첨단기술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산업용 눈금자는 소재.가공.디자인 등이 어우러진 '작품' 이다.

그런데 국산은 우선 철과 니켈을 합친 특수합금의 소재를 확보하기도 어렵다. 내열처리가 제대로 안돼 몇개월 쓰면 변형 돼 쭈글쭈글해진다. 눈금이 흐려져 자로 쓸 수 없는 쇠막대기로 변한다.

전자 계측장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값싼 제품은 국산이 몇개 있지만 고가품은 1백% 수입한다.

국산장비는 산업의 소형화.복합화.지능화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첨단제품의 개발도 중요하겠지만 산업의 기초가 되는 계측기기 분야의 육성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박정석 <삼한기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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