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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센츄리베스트 - (2) 한신 ; 팀의 역사 <下>

중앙일보

입력

10월 20일, 나고야 구장에서 펼쳐졌던 한신 대 주니치 전은 `73 시즌 한신의 129번째 경기였다 (당시는 팀당 130경기를 치뤘었다).

시합 전까지 2위 요미우리와의 승차를 반게임으로 유지하며 간발의 차로 선두를 지키던 한신으로선, 이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만 시즌 마지막 경기인 요미우리전에 상관없이 '자력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많은 오사카 팬들이 9년만의 우승 감격을 느끼고자 나고야로 원정 응원을 온 가운데 시합은 한신의 리드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신이 앞서고 있던 경기 후반에 감독 '가네다 마사야쓰 (金田 正泰)'는 팀의 우승을 결정지어줄 '도아게 투수 (감독을 헹가레 시켜줄 마지막 투수)'로 에이스 에나츠 유타카를 등판 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패착이 될 줄은 감독도, 팬들도, 에나츠도 알지 못했다. 팀의 우승을 책임지기 위해 등판했던 에나츠가, 우승을 눈앞에 두었던 9회말 주니치의 강타자 '기마타 다쓰히코 (木俣 達彦)'에게 밋밋한 직구를 던지다 그만 끝내기 홈런을 맞아 버리고 만 것이다.

자력으로 리그 우승을 거머쥐겠다던 타이거즈의 꿈은 믿었던 에이스 에나츠의 실투로 이렇듯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10월 22일, 한신은 센트럴 리그 우승의 향방을 놓고 요미우리와 고라쿠엔 구장에서 최후의 결투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이미 이런 긴장 속에서의 시합을 9년째 치러오고 있는 요미우리의 심리적 상태가 오랫만에 '무거운' 시합을 맞이한 한신의 그것을 앞서는 것은 당연한 것.

한신의 선발 우에다 지로 (上田 二郞)는 결국 이같은 심리적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초반부터 난타를 당하여 팀의 분위기를 가라 앉히고 만다. 거기에 요미우리의 에이스 '다카하시 카즈미 (高橋 一三)'의 완벽한 투구는 팀원들의 사기저하를 불러 왔고....

9대0. 한신의 패배로 `73 시즌은 막을 내리고 만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한신은 요미우리의 V9을 저지 하지 못한 채 또다시 패퇴하고 만 것이다.

아쉬웠던 `73 시즌 이후, 타이거즈는 '단골 A클래스 군단'으로써의 힘을 상당 부분 잃어 버리게 된다. `72 시즌을 끝으로 무라야마는 은퇴를 선언했으며, `75 시즌을 끝으로는 에나츠가 퍼시픽의 난카이 호크스로, `79 시즌엔 다부치가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하는 등 화려했던 팀의 전성기를 유지했던 슈퍼스타들이 점차 팀을 떠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2대 미스터 타이거즈' 가케후 마사유키 (掛布 雅之), 여전히 건재한 후지다 타이라, '한신 역사상 최고의 1번 타자'라 일컬어 지는 마유미 아키노부 (眞弓 明信), 요미우리의 에이스 였으나 '에가와 (江川) 파동'에 의해 한신으로 트레이드 되었던 고바야시 시게루 (小林 繁 / 역시 한신에서도 에이스가 된다), 야마모토 카즈유키 (山本 和行) 등의 스타가 계속 등장하긴 했으나 시즌 마다 투타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 등 이미 5 ~ 70년대 초반을 호령하던 호랑이의 모습은 잊혀져 버리고 만다.

급기야 `78 시즌에는 구단 사상 최초로 리그 최하위까지 떨어지는 등 우승을 눈앞에서 놓친 `73 시즌 부터 `84 시즌까지 10년간 한신은 매년 A클래스와 B클래스를 오고 가는 불안정한 전력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한신이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는 `85 시즌의 막이 오른다. 당초 전문가들이 뽑았었던 우승 후보는 당시 리그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고바 다케시(古葉 竹識) 감독의 히로시마 카프(廣島 カ-プ)와 만년 우승 후보 요미우리 자이언츠였다.

한신은 가케후 마사유키가 이끄는 타선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믿을 만한 선발이 없다는 이유로 시즌 전에는 전혀 주목 받지 못했었다.

`85 시즌을 맞이해 감독 자리에 다시 오른 요시다 요시오(吉田 義男 / `75 ~ `77 시즌 감독 역임)는 이 같은 투수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중간 및 마무리 진을 대폭 강화해 후쿠마 오사무(福間 納), 이토 후미타카(伊藤 文隆), 나카다 코지(仲田 幸司)의 계투진에 야마모토 카즈유키와 나카니시 기요오키(中西 淸起)의 더블 스토퍼 체제의 불펜진을 구성한다 (중간 계투진의 '벌떼 작전'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역시 한신 우승의 원동력은 활화산 같은 공격력에 있었다. 가케후 마사유끼 - 랜디 바스(Randy Bass, 사진) - 오카다 아키노부(岡田 彰布)의 클린업 트리오와 마유미 아키노부, 히로다 스미오(弘田 澄男), 사노 노리요시(佐野 仙好) 등 '단타준족' 타자들의 활약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이 공포의 타선은 시즌을 통털어 219개의 홈런 (게임당 1.69개)과 725득점 (게임당 5.58점)을 양산해 내었으며, 특히 가케후 - 바스 - 오카다의 클린업은 129개의 홈런과 343타점, 평균 타율 .331을 기록하며 각 팀 투수들의 '경계 대상 1호'로 지목 된다.

이들은 4월 17일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3대1로 뒤지고 있던 7회말 1, 2루에서 바스가 상대 투수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백스크린을 맞추는 역전 3점 홈런을 뺏어낸 것을 시작으로 가케후와 오카다가 연이어 등장하며 백스크린을 맞추는 홈런을 쳐내, 그 유명한 '백스크린 3연발'의 전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특히나 팀의 1루수와 3번 타자를 맡았던 바스는 "그가 없었더라면 85년의 한신 우승도 없었다."라는 이후의 평가처럼 '전설적'이라 불릴 만한 대활약을 펼치며 리그 MVP를 차지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여느 팀에나 있을 법한 '평균 레벨의 용병'이었던 그는 `85 시즌을 맞이하며 타격의 기량이 만개, 타격 1위 (.350), 홈런 1위 (54개 / 역대 2위), 타점 1위 (134)를 거머 쥐며 한큐의 부머 웰즈(Boomer Wells)에 이어 사상 두번째의 외국인 '타격 3관왕' 자리에 오른다.

바스 등의 활약으로 한신은 10월 16일 야쿠르트를 격파하며 21년 만에 센트럴 리그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일본 시리즈마저도 히로오카 다쓰로(廣岡 達郞) 감독이 이끄는 퍼시픽 리그의 신흥 강호 세이부 라이온즈(西武 ライオンズ)를 4승 2패로 누르며 제패해내고야 만다. 바스는 일본 시리즈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우승을 이끌어 내어 시리즈 MVP에도 뽑히는 영광을 누린다.

이렇게 한신이 양리그 분리 이후 처음으로 일본 시리즈를 제패하자 오사카(大阪)를 위시한 간사이 지방 전체는 완전 축제 분위기였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몇몇 젊은이들이 3미터 높이의 다리 난간 위에서 강물로 뛰어 내리는 모습을 보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신은 `85 시즌 우승 이후 투타 양면에서 붕괴되며 하위권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스는 `86 시즌에도 타격 3관왕을 거머쥐며 같은 기간 2년 연속 타격 3관왕을 차지한 퍼시픽 리그 롯데 오리온즈의 오치아이 히로미츠(落合 博滿)와 함께 '대타자'로써의 성가를 올리긴 했다.

하지만 가케후가 스프링 캠프 때 입은 부상으로 타격폼이 무너지며 더이상 예전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투수력 또한 완전히 붕괴되는 등 팀의 전체적인 전력이 크게 약화 되고 만 것이다.

결국 `87 시즌 때 구단 사상 두번째로 리그 꼴찌에 떨어졌던 한신은 `2000 시즌까지 무려 8회나 더 리그 꼴찌를 경험하고 마는 '최악의 상태'로까지 전락하고 만다.

와다 유타카 (和田 豊), 신죠 츠요시 (新庄 剛志), 야부 게이이치 (藪 惠壹), 토마스 오말리 (Thomas O'Malley) 등 리그를 대표할 스타급 선수들은 꾸준히 배출되나, 이들 몇몇 선수들을 제외하면 거의 매년 지지부진한 전력을 유지하는 한심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현재 우리가 한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안좋은 인식의 토대가 바로 이때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운때가 맞지 않았는지 많은 돈을 들여 영입한 용병들은 '바스'의 활약을 더욱 그립게 만들어 주었고, 베테랑 선수들은 '초라한 말년의 활약'을 보여주었으며 대부분의 신인들은 '유망주'라는 딱지를 떼어 내는데 실패했을 뿐이다.

한신의 프런트는 야쿠르트를 90년대 최강의 팀으로 이끈 노무라 가츠야(野村 克也)를 감독으로 영입하기도 하지만 (`99), 그의 ID 야구도 후루타 아츠야(古田 敦也)라는 걸출한 포수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는지 한신이라는 팀에서는 이렇다할 실적도 올리지 못하고 감독 취임 2년 동안 최하위 자리를 지켜내었을 뿐이다.

수년째 계속 되고 있는 고질적인 장타력의 부재와 기동력의 상실을 벗어나고자 한신은, `2001 시즌에는 메이저 출신의 용병들과 함께 준족의 신인들을 대폭 기용하여 팀 분위기를 일신하려 하고 있다 (노무라는 여기에 대해 "5년 내에 우승할 것이다"라며 호언장담하는 중이다).

"한신이 요미우리에게 15년 연속으로 지고 있는 마당에 무슨 전통의 '교-신센(巨人-阪神戰)' 이냐.", "매년 꼴찌만 하는데 무슨 일본 '제 2의 구단'이냐."는 말도 나오고 있는 요즘, 오사카를 위시로한 간사이 지방팬들은 한신 타이거즈가 예전의 명성을 하루 빨리 찾아 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오사카 호랑이들의 우렁찬 표효가 다시 울려 퍼질 날이 빨리 오길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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