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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中역사 지도 봤더니 한반도 허리까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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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중국 지도들. 모두 한반도까지 중국 세력이 뻗쳤다고 주장한다. ①진시황의 땅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인데 전혀 근거가 없다. ②한나라의 판도를 보여주는 지도.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인데 한사군은 발해만에 있었다는 학설도 있다. ③조조의 위나라가 한반도의 허리를 지배했다는 것으로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출처=중국 지도 출판사의 중국강역변천여지도발전]

중국의 역사병이 또 도졌다. 이번엔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의 길이를 2만1196㎞로 발표했다. 만리를 곧이곧대로 4000㎞로 보면 5배나 늘린 것이다. 그것도 한반도의 과거사가 펄펄 살아 있는 만주 벌판을 가로지르게 만들었다. 중국 국가문물국이 최근 발표한 신판 만리장성의 골자는 명(明)대에 동서로 추가된 국경 초소인 변장(邊墻)을 장성(長城)으로 격상시키고, 특히 동쪽으론 한민족의 고구려ㆍ발해 조상이 세운 성(城)을 만리장성에 편입시킨 것이다. 고구려ㆍ발해 역사를 부인하는 발상이며 한민족사를 압록강 아래의 한반도로만 구겨 넣겠다는 중화 정신의 고집이다. 명대 역사 전문가인 강원대 사학과 남의현 교수(사진)에게 최근 중국 만리장성 왜곡의 문제점을 들었다.

-중국 국가문물국이 발표한 ‘신판 만리장성’ 주장에는 어떤 문제가 있나.
“중국 광명일보 기사에 따르면 새로 늘어난 장성에는 베이징, 톈진, 허베이성, 산시(山西)성, 네이멍구 자치구,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산둥성, 허난성, 산시(陝西)성, 간쑤성, 칭하이성, 신장위구르 자치구 등 15개 성·자치구 직할시의 성터가 포함된다. 종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서(西)로 자위관, 동(東)으로 산해관까지로 인정돼온 장성을 동서로 몇 배나 연장한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특히 동쪽으론 압록강을 거쳐 헤이룽장성까지 장성이 이어졌다는데 이는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우선 고구려와 발해의 무대였던 랴오닝ㆍ지린ㆍ헤이룽장성의 경우 명대 이전 여기엔 중국의 장성이라고 주장할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성들은 고구려나 발해의 것들이다. 중국의 장성이 압록강에 닿은 적도 없고 헤이룽장성 무단장까지 이어진 역사도 없다.”

중국이 ‘신만리장성’의 근거로 삼은 명(明)대의 변장을 보여주는 지도.(왼쪽의 성 표시) 변장은 장성이 아니고, 압록강에 닿지도 않았으며, 오늘날 헤이룽장성의 무단장까지 연결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은 18세기 조선 및 청의 지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자료=남의현 교수]

-중국 역대 왕조가 끊임없이 만리장성을 계속 추가해 왔으니 장성의 길이를 연장할 수 있지 않은가.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만리장성은 진(秦)시황 때 시작됐다. 전국을 통일한 뒤 몽염에게 30만 군사를 주고 북의 흉노를 막기 위해 장성 축조를 지시한 것이다. 30년 뒤 진은 망했지만 한(漢)이 건설을 이어갔다. 그래서 장성의 길이가 진 때는 5000㎞, 한때 1만㎞, 명대 6000㎞이며 역대 장성을 다 합치면 5만㎞라는 설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만리장성은 서쪽 자위관(가욕관)~동쪽 산해관까지’라는 게 정설이었는데 중국은 이를 2009년 뒤집었다. 동쪽으론 산해관에서 압록강ㆍ단둥까지 연장했다. 장성의 동쪽 기점을 압록강 연변인 단둥의 호산산성이라고 한 것이다. 이 성은 1990년대 산등성에 벽돌로 신축한 것인데 역사적 근거도 없고 고증도 안 됐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거기서 동북쪽 무단장까지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중국이 동북 방향으로 장성의 길이를 늘린 근거는 무엇인가.
“공식 발표는 없지만 그동안 중국 학계의 움직임으로 미루어 보면 명대의 변장이 근거다. 명은 만주의 북방 민족에 대한 대책으로 ‘서단변장-요하투변장-동단변장’이라는 방어망을 만든다. 서단ㆍ요하투변장은 몽골을, 동단변장은 만주ㆍ여진족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명이 장성이란 용어 대신 변장이란 용어를 쓴 점이다. 변방의 담장이란 뜻의 변장은 말 그대로 성벽이 없다. 허물어져 없는 게 아니라 원래 없다. 명대에는 벽돌로 성을 만들었는데 변장은 성벽이 아니다. 변장은 보(堡)다. 초소란 뜻이다. 적이 들어오기 쉬운 중요한 길목에 주둔해 군사적 기능을 한다. 규모는 군사 3~100명까지 다양하다. 전초기지일 뿐 장성이 아니다. 상부인 위소(衛所)의 관할을 받아 선으로 연결되는 군사 방어선이다. 위험이 있으면 봉화로 후방에 통보한다. 그런데 이 보로 연결된 변장을 벽돌 성으로 연결된 장성으로 만든 것이다.”

강원대 사학과 남의현 교수가 15일 ‘만리장성은 2만여㎞’라고 한 중국 국가문물국의 최근 발표를 반박하고 있다. 한마디로 전혀 근거 없는 부풀리기라는 것이다. 춘천=최정동 기자

하지만 명은 압록강변에 동단변장의 일환인 강연대보를 뒀다. 이는 압록강이 명의 땅임을 보여주지 않나.
“동단변장이 장성이면 강연대보도 그 일부다. 따라서 압록강이 조선과 명의 국경이 된다. 그래서 중국 학자들은 동단변장을 중요시한다. 명대 이전 한반도 내 어떤 정권도 압록강을 넘은 적이 없으며 동단변장이 그 증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압록강 건너 180리까지는 공한지다. 연산파절(연산관)까지 가야 명나라 초병이 처음 보인다’고 했다. 명 초기인 1480년 이전까지 압록강~중국 내륙 180리는 명의 땅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이후 명이 역참(站·초소)을 정비하면서 15세기에 ‘강연대보’를 압록강 가에 설치했다. 지금의 호산 부근이다. 그렇게 보 하나 설치한 것으로 명의 관역이라 할 수는 없다. 그 보도 18세기 청 지도에는 동단변장에 포함되지 않는다. 조선 백성도 공한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국경인 책문(국경)은 훨씬 내륙인 봉황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동단변장은 장성의 형태로 압록강에 닿은 적이 없다.”

-명의 압록강 접근을 조선은 어떻게 봤나.
“초기 연산관에 있던 명의 책문은 봉황성으로 전진 이동됐다. 그리고 계속 보를 압록강 쪽으로 옮기면서 결국 강연대보를 설치했다. 국경은 여전히 봉황성이 ‘조선 사신이 오는 동안 여진에게 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에 조선 조정에선 ‘양국 간 공한지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문제가 계속 제기됐다. 사료에 따르면 조선 중기로 갈수록 논쟁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도 강연대보 설치가 명의 영토 확장이 아니라 여진족 방어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완충지대의 초소쯤 된다.”

-중국이 왜 이렇게 역사를 왜곡하나.
“중국은 늘 압록강을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이라고 주장해 왔다. 한국사가 만주로 못 넘어오게 한다. ‘신만리장성론’은 이를 못 박으려는 것이다. 압록강까지 끌어 붙인 동단변장을 장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압록강의 역사를 중국에 넘기는 것이다. 또 당시 만주 동부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한 만주족(여진족)을 명나라가 확고하게 지배했음을 인정하는 것이 돼 한·중 국경사를 새로 써야 한다. 이 역시 조선과 여진의 과거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조선도 여진을 통제했다. 그들을 통해 만주 정세를 파악했고 국내로 받아들여 정착시키거나 관직을 줘 통제했다. 여진족을 두고 명과 조선 양국이 각축을 벌인 것이다. 여진이 명의 관할로 들어가버리면 더 이상 조선은 만주에 대해 말할 빌미가 없어진다.”

-장성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의 헤이룽장성 무단장까지 이어진다고 하는데 무슨 근거가 있나.
“기사엔 그런 자세한 내용까지는 없다. 국가문물국 발표에 ‘장성이 동으로 지린성과 헤이룽장성까지 이어진다’고 한 게 그렇게 해석될 뿐이다. 지린성ㆍ헤이룽장성엔 고구려ㆍ발해의 성터만 있다. 명대의 벽돌 산성과 달리 모두 산 위에 쌓은 고구려식 석성(돌성)이다. 신만리장성론에 따르면 고구려 성인 만주 백암산성도 만리장성의 일부가 된다. 중국은 그를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부정하고, 이곳이 이미 한화(漢化)가 된 땅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동북공정의 연장이다.
요컨대 ‘장성’의 핵심 개념은 ‘연결돼 있다’는 것인데 지금 중국 논리처럼 떨어져 있는 여러 다른 성들을 다 연결시켜 장성이라고 한다면 춘천의 봉의산성이나 원주의 치악산성도 장성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명대에 백두산 기슭에 영정사가 세워졌는데 이는 명의 만주 지배를 보여주며 따라서 그 지역에 중국의 장성이 들어설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명이 만주에 동단변장이라는 담을 친 것은 그곳이 남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명대 사료에 태종은 5차 몽골 정벌 뒤 만주로 진출해 자기들 군사 체제에 해당하는 여진위소를 180대 설치했다고 나온다. 그렇게 보면 만주가 명나라 땅인 것 같다. 그런데 이후 사료를 보면 그게 직접 통치가 아니라 명목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태종은 1409년 지금의 오호츠크해와 만나는 헤이룽장강 하류에 노아간위를 두고 곧 도사(都司)로 승격시켜 이 지역을 다스렸다고 나온다. 그런데 도사는 휘하에 25개 이상의 위가 있다. 1위의 군사가 보통 5600명이다. 1위의 최소 병력은 10만 명 이상이다. 그런데 노아간 도사엔 그런 게 없었다. 실제로 상주하거나 지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주가 산삼, 모피, 해산물 등으로 유명하니 이를 확보하려고 보냈을 뿐이다. 결국 교통이 불편하고 경영할 역량이 안 돼 1430년대에 철폐한다. 그게 어떻게 사료의 주장대로 명이 통치한 땅인가. 그러니 절을 세웠다는 것을 힘이 미쳤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지속적 왕래 정도로 볼 수 있다.”

-이번에 그런 얘기가 나오진 않았지만 명이 강원도 북부에 철령이란 통치 기구를 세웠다는 말까지도 나온다.
“철령이 강원도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사료에 70 몇 개의 참을 설치한다는 기록을 기계적으로 해석한 탓이다. 중국 학자들이 참과 참 사이의 기본 거리를 놓고 계산한 것이다. 당시 정세와 관계없이 거리만 계산해 강원도의 철령이라 한 것이다. 중국 역사엔 철령 후보지가 많다. 압록강 중부의 지안도 그중 하나이고 선양 인근의 봉집보도 후보다. 최종적으론 지금의 랴오닝성 북부에 있게 됐다. 그곳의 몽골 세력이 워낙 세니까 대응하기 위해 뒀다.”

춘천=안성규·홍상지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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