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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강경애가 경성 문단을 떠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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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아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식민지 시기 여성 작가라고 하면 글 몇 편 대충 쓴 뒤 문단에서 사교활동을 통해 명성을 얻었던 신여성이라는 선입견이 많다. 이러한 선입견을 만드는 데에 실제로 나혜석, 김명순, 김원주 등의 행보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런데 강경애(姜敬愛·1906~44)는 좀 달랐다. 강경애는 ‘인간문제’와 같은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리얼리즘 장편소설과 ‘지하촌’ ‘소금’ ‘원고료 200원’ 등과 같은 뛰어난 작품들을 양산해 낸 ‘진짜’ 작가였다. 대중들에게는 아직 그 이름이 친숙하지 않지만 국문학계에서는 이제 어느 정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도 한국 문학사에서 좀 더 주목해야 할 작가다.

 그녀는 경성의 문단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그것이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했으나, 그녀가 당대 문단으로부터 재능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남성 문인 및 비평가들의 관심을 덜 받았기 때문에 다른 여류 문인들에 비해 덜 유명해졌던 것이다.

 그런 그녀도 경성에서 문인들과 가깝게 지내던 시절이 잠깐 있었다. 그녀가 양주동(梁柱東)과 함께 고향 장연을 떠나 경성의 ‘금성’사에서 동거를 하며 문학공부를 했던 것이 1924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양주동과 반 년 만에 결별했다. 그녀가 당시 심경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다음의 글은 이후 그녀가 양주동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군의 평론을 보아 나가다가 끝까지 보아야 또 그 소리이기 때문에 그만 중도에서 내던지고 말았으나 그 내용과 주장이 여전히 이전치의 재탕이다. (…) 첫째는 그 평론에 우월적 태도가 노골 보이는 것과 둘째는 자기 선전 도전의식을 은연히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상세히 말하면, 군의 문단 좌우파를 초월한 고답적 지위에 있어가지고 양 파를 두 손으로 주무르려는 듯한 우월적 태도가…”(강경애,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 조선일보, 1931.2.11).

 강경애는 양주동이 쓴 평론에 대해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했다.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는 예전 글의 재탕이고, 우월의식과 동시에 인정 욕망으로 유명한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 싶어 하는 글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때 사랑하고 존경했던 이에 대해, 어쩌면 경성의 문단 생활 전체에 대해 환멸을 느꼈던 듯하다. 그녀는 그와 헤어진 뒤 고향에서 지내다 1931년 장하일(張河一)과 결혼해 간도로 떠났다. 그녀는 다시는 경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영아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