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안방인 듯 시즌 5승, 상금 1·2·3·5·6위 차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3호 19면

매주 한국 자매들의 잔치가 이어지며 일본 투어 분위기는 썰렁해지고 있다. 2010년과 2011년 상금왕을 안선주에게 내주며 자존심에 상처 입었던 일본 선수들 사이에서는 “우승 상금을 한국인에게 모두 빼앗겨버려 분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러다 골프 대회 수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말도 공공연히 흘러나온다.

일본골프투어 휩쓸고 있는 한국 자매들

한국 자매들은 1985년 구옥희(56)가 JLPGA 투어 첫 승을 거둔 이래 일본 무대에서 총 121승을 했다. 일본 진출 25년 만인 2010년 7월 안선주가 스탠리레이디스토너먼트에서 100승을 채웠는데 불과 2년도 안 돼 21승을 추가했다. 한국 자매들은 2010년 시즌 최다승인 15승을 합작했다.

한국 선수들이 일본 투어를 점령한 이유는 두터워진 선수층에서 찾을 수 있다. 5년 전만 해도 한국 투어의 유망주들은 해외 진출 시 일본이 아닌 미국을 선호했다. 일본을 미국 투어로 가기 위한 디딤돌 무대쯤으로 생각하는 선수도 많았다. 하지만 올 시즌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은 20여명으로 늘어났다. 경기 불황으로 미국 투어의 수가 줄어든 데 반해 일본 투어는 꾸준히 성장하면서 신지애(24·미래에셋), 박인비처럼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는 선수도 생겼다.

두터워진 선수층을 기반으로 한국 자매들은 매주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다. 시즌 두 번째 대회였던 PRGR 요코하마레이디스에서는 이보미와 안선주가 연장전을 치른 끝에 이보미가 우승했다. 티 포인트 레이디스 토너먼트에서는 우승자 이지희를 비롯해 3위까지가 모두 한국 선수였다.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인 월드레이디스 살롱파스컵에서도 안선주가 박인비, 모건 프레셀(24·미국)과 연장전을 치른 끝에 우승했다. 매 대회 5명 이상이 톱 10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한국 투어인지 일본 투어인지 혼동될 정도다.

일본 선수들이 부진한 것도 한국 독무대가 차려진 큰 이유다. 일본을 대표하는 요코미네 사쿠라(27), 모로미자토 시노부(26) 등은 올 시즌 약속이나 하듯 부진에 빠져 있다. 아리무라 치에가 1승을 거두긴 했지만 다른 대회에서는 예선 탈락하는 등 기복이 심하다. 20대 초반 신예들이 샘솟듯 등장하고 있는 한국 골프계와 달리 일본 골프계에서는 실력있는 신예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미국을 오가며 여자 골프를 취재하고 있는 마사키 다치카 기자는 “한국 선수들은 승부에 대한 집착과 헝그리 정신이 뛰어나다. 반면 일본 선수들은 ‘2위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일본식 겸양의식이 깔려 있다. 일본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에게 멘털을 배워야 한다”고 평가했다.

올 시즌 JLPGA 투어는 35개 대회에 총상금 29억6300만 엔(약 445억원)이 걸려 있다. 27개 대회에 약 4700만 달러(약 544억원)가 걸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와 비교해 상금은 좀 뒤지지만 투어 수는 더 많다. 상금도 짭짤하고 투어 경비나 세금은 미국에 비해 절반 수준인 실속 있는 투어라고 알려지며 일본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맏언니인 이지희는 “예전에는 일본을 거쳐 미국에 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생각이 바뀌었다. 일본에서 가능한 한 오래 활동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지난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던 이보미는 올해 일본 투어에 집중하며 상금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이보미는 “지난겨울 스폰서를 비롯해 클럽·스윙까지,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걸 바꿨다. 올해 일본 투어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생각보다 빨리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 투어와 한국 투어의 차이점에 대해 이보미는 “투어 환경이 너무나 다르다. 일본 투어는 매주 수만 명의 갤러리가 대회장을 찾는다. 연습 환경도 최상이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대회에 맞춰 골프장 운영을 하기 때문에 언제든 라운드를 할 수 있다. 일본 코스는 페어웨이가 좁고 2개의 그린으로 조성돼 있어 정교함이 중요한데 그런 코스에서 경기를 하다 보니 실력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다”고 전했다.

물론 한국 선수들에게 일본 투어가 제집처럼 편안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한 선수들은 투어 생활에 불편을 겪는다. 일본 선수들과 친해지지 못하고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외로움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차별도 넘어서야 할 벽이다. 일본 투어는 몇 년 전부터 룰 테스트 때 일본어 통역 동행을 금지하고 있다. 반대로 인터뷰를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을 대동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 투어에서 활동하려면 일본어를 어느 정도 습득하고 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인종차별적인 조치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자국 선수가 우승하기를 바라는 일본 언론은 한국 선수의 우승이 확실해지면 일본 선수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그래도 한국 자매들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투어에 동참하고 있다. 지난해 이지희와 전미정, 신현주(32)는 관동 대지진 피해 복구 성금으로 5000만엔(약 4억5000만원)을 내놨다. 이 일로 인해 일본 언론의 한국 선수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