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많이 긁었는데 카드 할인 0원? 알고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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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1 “이상하다. 분명 많이 긁었는데….” 서울 화곡동에 사는 회사원 서연정(32·여)씨는 최근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벌써 몇 달째 쇼핑·통신비를 할인받기 위해 만든 신용카드의 할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사에 전화한 후에야 최근 카드사가 할인받을 수 있는 전월 사용액 기준을 20만원에서 30만원으로 올린 사실을 알게 됐다. 서씨는 갖고 있던 신용카드 4장 중 절반을 정리했다. 그는 “카드사가 혜택 등만 요란하게 선전한 할인 혜택이 사실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며 “어차피 매월 장당 30만원 이상씩 쓰면서 할인 혜택을 누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2 직장인 최영(38)씨가 올해 1월 발급받은 주유·교통 할인카드는 불과 3개월 만에 ‘무용지물’이 됐다. 최씨는 지난 4월 이 카드로 주유비 등을 포함해 70만원이 넘는 금액을 결제했다. 전월 실적 기준을 충분히 넘겼지만 할인된 금액은 ‘0’원에 가까웠다. 카드사에 확인하자 “일부를 할인받은 결제 건은 물론 주유소에서 결제한 금액도 모두 전월 실적에서 빠진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최씨는 “자주 쓰는 곳에서 할인을 받기 위해 카드를 신청했는데 정작 다른 곳에서 카드를 쓰지 않으면 할인을 받을 수 없다는 얘기”라며 “카드사의 문턱 높이기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 치열해지고 있다. ‘체리피커’와 신용카드사의 얘기다. 체리피커는 신용카드사의 할인 혜택만 골라 이용하는 소비자를 뜻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체리피커가 가장 적절하게 카드를 이용하는 이상형이지만 카드사 입장에서는 회사의 수익을 갉아먹는 얌체 소비자다.

 1라운드가 체리피커의 승리였다면 2라운드는 신용카드사의 강력한 방어막으로 체리피커가 크게 움츠러들고 있는 형국이다. 신용카드가 크게 확산된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까지를 1라운드로 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카드사는 덩치(고객 수)를 늘리느라 소비자에게 각종 ‘당근(할인 혜택)’을 제공했다. 이 탓에 주요 카드사의 할인 혜택만 ‘활용’하는 체리피커가 우후죽순처럼 늘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2라운드가 시작됐다. 카드사의 반격이 만만치 않다. 수수료 인하와 금융당국의 카드론·현금서비스 규제로 수익률 감소를 우려한 카드사가 체리피커 솎아내기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카드사의 방어막은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다. 초보 체리피커가 섣불리 싸움에 뛰어들었다간 무장해제되기 일쑤다. 단순히 할인가맹점을 줄이거나 할인율·적립률을 낮추는 수준이 아니다. 카드사는 아예 혜택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월 이용액 기준을 높이거나 이용·적립액에 포함되는 항목 자체를 줄이고 있다. 구간별·영역별 할인이라는 이름으로 혜택을 제한하기도 한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이 같은 ‘원천봉쇄형’ 서비스 변경이 다소 늘었다”며 “최근에는 대표 인기 카드의 서비스에 손을 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올 4월까지 7개 전업계 카드사가 축소한 부가서비스는 총 193건에 달한다. 그중 올해 들어 전월 이용액 기준 등 핵심 서비스를 줄인 경우는 10건이 넘는다. 3월부터 신한카드로 놀이공원·요식·영화 할인 혜택을 받으려면 전월 실적이 30만원을 넘겨야 한다. KB국민카드도 최근 ‘굿데이카드’의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전월 실적 기준을 30만원으로 올렸다. 11월부터는 실적에 할인받은 이용 전체 금액은 물론 아파트 관리비·대학등록금 등 결제액이 큰 항목은 빼기로 했다. 또 고객이 자주 찾는 ‘항공 마일리지’ 적립 기준도 대부분 까다롭게 바뀌었다. 앞으로는 신한·KB국민·삼성카드 등에서 무이자 할부 이용 금액이나 이미 할인받은 금액은 마일리지 적립을 받을 수 없다.

서비스 축소로 고객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대학원생 김민영(29·여)씨는 “ 홈페이지를 들여다봐도 ‘통합형 할인’이나 ‘결제회수금’ 등 어려운 용어가 많아 이해하기 힘들었다”며 “각종 조건을 맞춰 혜택을 온전히 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서영경 서울 YMCA 신용사회운동사무국 팀장은 “소비자는 카드사의 보여주기식 할인에 현혹돼 여러 장의 카드를 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다” 고 말했다.

카드사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수익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올해 1분기 대다수의 카드사는 전분기 대비 20~30% 하락한 수익을 내는 데 그쳤다. 카드수수료 인하와 카드론·현금서비스 규제 등이 원인이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고객이 누리는 할인 혜택도 결국 카드사의 비용”이라며 “카드사는 앞으로도 체리피커를 걸러내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카드사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신용카드의 혜택이 줄어들면 현금이나 직불카드를 이용하게 될 것”이라며 “개인은 물론 사회적으로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수익 악화에 따른 카드사들의 자구책 마련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한기 경실련 경제정책팀 팀장은 “카드사들은 지난해 주요 경영진에 대한 보상금액을 전년에 비해 평균 40%나 늘렸다”며 “그러면서 가맹점수수료 인하의 부담은 바로 소비자에게 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혜미 기자

체리피커(Cherrypicker)

신포도는 먹지 않고 단맛 나는 체리만 쏙쏙 골라먹는 사람이란 뜻. 기업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지 않으면서 실속만 챙기는 소비자를 말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체리피커는 전체 신용카드 이용자의 20%대에 육박했지만 최근에는 1%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 체리피커는 많이 줄었지만 모든 소비자는 체리피커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요즘에도 할인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고객은 20%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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