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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1) 쑨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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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새해 첫날,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기 위해 각 성 대표와 군사고문 등을 대동하고 난징에 첫발을 디딘 쑨원(가운데). 날씨 탓도 있었지만 분위기가 살벌하다. 쑨원 왼쪽은 비서장 후한민(胡漢民).  [사진 김명호]

1911년 10월 11일 아침,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의 유서 깊은 황학루(黃鶴樓)에 낯선 깃발이 펄럭였다. 별 18개가 그려진 혁명군 깃발이었다. 보기에 촌스러웠지만 대청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조기(弔旗)나 다름없었다.

당시 쑨원(孫文·손문)은 미국에, 황싱(黃興·황흥)은 홍콩에 있었다. 지도자를 찾던 혁명군은 후베이 신군(新軍) 통령(統領·여단장과 사단장 중간) 리위안훙(黎元洪·여원훙)을 후베이 군정부(軍政府) 도독에 추대했다. 그날 밤, ‘공화적중화민국(共和的中華民國)’의 수립과 청 왕조의 연호를 폐지한다고 선포해 버렸다. 각 성의 신군들도 제각각 군정부를 수립해 호응했다.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갈 징조였다.

11월 30일, 11개 성 대표 23명이 한커우(漢口)의 영국 조계에 모였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후베이 군정부가 중앙 군정부 직무를 대행하기로 의결했다. 이어서 청나라 정부의 내각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공화제를 지지하면 임시 대총통에 추대하기로 합의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장쑤(江蘇)와 저장(浙江)의 연합군이 난징(南京)에 입성하고 청나라 군대가 한양(漢陽)을 점령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수도를 난징으로 하고 임시 대총통 선출을 위한 선거인단 구성안을 통과시켰다.

난징을 점령한 세력들은 생각이 달랐다. 상하이에 와있던 각 성 대표를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황싱을 대원수에 추대해 임시정부를 조직하게 하고 리위안훙을 부원수로 천거했다. 리위안훙은 기분이 상했던지 취소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12월 14일, 우한과 상하이를 비롯한 각 성 대표가 난징에 집결했다. 소식을 접한 위안스카이는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조선 주둔 시절 측근으로 발탁한 탕사오이(唐紹儀·당소의) 편에 자신의 속내를 전했다. “나도 공화제를 지지한다. 명분이 있어야 한다. 국민회의를 열어서 공화제를 의결해라. 황제 퇴위는 책임지겠다.” 전군을 장악하고 있는 위안스카이의 의중이다 보니 천금의 무게가 있었다. 임시 대총통 선출이건 뭐건 뒤로 미뤘다.

그래도 뭔가 결정은 해야 했던지 리위안훙을 대원수로, 황싱을 부원수로 추대했다. 황싱이 거절하자 리위안훙은 대원수 명의로 황싱에게 대원수 직무대행을 위임했다. 난징 갈 채비를 하던 황싱은 쑨원의 귀국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자 상하이에 주저앉았다. “쑨원 귀국 후에 결정하겠다.”

12월 25일, 쑨원이 상하이에 도착하자 대총통 선거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29일 오전 9시, 17개 성 대표 45명이 상하이의 장수성 자의국(咨議局)에서 대총통 선거를 실시했다. 후보는 쑨원, 황싱, 리위안훙 세 사람이었다. 투표권은 각 성당 한 표였다. 쑨원이 16표를 얻었다.

1912년 1월 1일 오후 5시 쑨원을 태운 열차가 난징에 도착했다. 추위가 뼈를 파고드는 듯했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고 한다. 무슨 취임식을 밤 11시에 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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